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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거짓말
leed2017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 말을 맨 처음으로 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옛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로 알고 있다. 이 말은 처음에는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중에 ‘사회적’이란 말이 ‘정치적’이란 말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으로 안다. 누가 왜 바꿨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모른다. 그러나 바꿔진 말도 천하의 명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가끔 나는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봐도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고 할 경우가 드물 정도로 정치적인 행동을 할 때가 많다. 부끄럽지만 이 세상에서 나와 제일 가까운 사람, 즉 아내나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하려고 들 때가 있으니-.

 

 도대체 ‘정치적’이란 무슨 뜻일까? 나는 그 말의 사전적 정의를 떠나서 그 말속에 배어있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어의학자(語意學者: Semantician)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대로 정치적이란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로 쓴다.

 

 첫째, 정치적이라는 말속에는 어느 정도의 거짓이나 위선이 숨어 있다. 그러니 정치적=거짓, 혹은 위선이라는 등식(等式)이 성립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좀 더 연장하면 사기나 날조, 음모에 가까워진다.

 

 국회의원 같이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물론, 한 조직체의 수장으로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기업체의 사장이나 종교단체의 성직자, 사회의 기관장 같은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다. 이들은 조직원 개개인의 의견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조직원들에게는 항상 귀에 즐거운 음악만 들려줄 수는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속생각을 그대로 내놨다가는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수가 있다.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예가 성직자들의 행동에서다. 이 신도(信徒)에게 한 말 다르고, 저 신도에게 한 말이 다를 경우, 신도들은 꼬투리를 잡고 불만을 쏟아놓을 것이다. 이렇게 성직자에 대해서 유난히 말이 많은 것은 그들에 대한 비판이나 불만을 털어놓아도 보복이 따를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계산 때문일 경우도 있다. 사랑과 용서를 전파하려는 성직자들이 보복이나 불이익을 줄 가망은 매우 적지 않은가. 그러니 불평불만을 밖으로 내놔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그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하며 산다. ‘반갑습니다’ ‘죄송합니다’ 따위의 가벼운 인사성 말까지도 거짓말로 규정한다면 사람은 하루에 평균 150번 이상 거짓말을 한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보고가 있다. 많은 경우 거짓말은 가십(gossip)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거짓말이나 가십이 전혀없는 사회를 상상해보라. 모든 재판소와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마는 참혹한 광경이 벌어질 것이다. 상상만 해도 오싹 한기가 느껴진다.

 

 거짓말이 정치적이라 해도 상황에 따라서는 무척 좋은, 건강한 거짓말일 떄가 있다. 예로, 우리가 어느 저녁식가 자리에 초대되어 갔는데 그 집주인의 음식솜씨가 허무하다고 하자.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는 ‘잘 먹었습니다’ 정도로 음식 솜씨를 칭찬해 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이 경우 거짓말은 ‘좋은’ 거짓말이다. ‘이걸 음식이라고 했나요?’ 하고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내놓는 것은 잔인한 행동, 사회적으로 적절한 발언이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거짓말은 남에게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다. 불법주차를 하는 것은 어떤 때는 잡혀서 벌금을 내나, 어떤 때는 잡히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에 불법주차 버릇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전문용어로는 부분강화로 형성된 행동이라 소멸이 극히 느리다. 거짓말도 이와 똑간다.

 

 둘째, 정치적 행동에는 의견차이가 났을 때 협상 내지 타협, 절충이 있다. 옛날 같으면 조직의 우두머리나 영향력 있는 조직원 몇몇에 충성하는 일편단심 하나로 별 문제가 없이 지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요새는 충성심이란 덕목마저 어리석고 고지식한 행동으로 보일 때가 많은 세상. 현대사회에서는 남과 의견이나 이해관계로 충돌이 있을 때는 협상을 하고 절충을 해서 서로 한 발짝씩 물러설 줄 아는 아량이 필요하다.

 

 배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며 물건을 팔고 사던 옛 그리스 문화에서 싹이 튼 서양문화는 일찍부터 논쟁이니 설득, 타협이니 절충 같은 말에 익숙하였다. 그러나 농경사회에 뿌리를 둔 한국 같은 동양문화권에서는 정직, 신의, 절개 같은 말이 더 익숙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단어라도 두 문화에서 쓰는 어감이 서로 다를 때가 많다. 예로, aggressiveness(공격성) 같은 단어는 미국 같은 서양문화권에서는 박력있고 꿋꿋한 사람이라는 좋은 의미로 쓰이나, 한국 같은 동양문화권에서는 남에게 대들고, 자기주장만 앞세우는 고집쟁이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내게 있어서 정치적이란 말은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어감 쪽으로 쏠릴 때가 많다. 남과 비교해서 내가 쓰는 단어의 의미가 다른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말이란 남들이 쓰는대로 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내게도 정치적이란 말이 좋은 의미로 쓸 날이 올까? 요새 한국에서 정치를 전문적으로 한다는 사람들이 하는 꼴을 보면 그런 날은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나서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도 올 것 같지는 않다. (20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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