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227 전체: 388,407 )
꽃은 피려하고
leed2017

 

꽃은 피려하고 버들도 푸르려 한다

빚은 술 다 익었네 벗님네 가세그려

육각에 두렷이 앉아 봄 맞이 하리라

 

 꽃도 버들도 모두 피려고 하고 빚은 술도 다 익어가니 벗님들아 놀이나 가세. 육각 정자에 빙 둘러 앉아 봄맞이 하면서 술이나 마셔보세 그려.

 조선 후기의 가객 노가재(老歌齋) 김수장의 작품이다. 노가재는 전주 출신으로 숙종조에 서리를 지냈으나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옷 벗어 아이 주어 술집에 볼모하고

청천을 우럴어서 달더러 물은 말이

어즈버 천고 이태백(李太白)이 날과 어떠하드뇨

 

 옷을 벗어 아이에게 주며 술집에 저당 잡히고 하늘을 우러러 달 보고 물은 말이 아, 그 옛날 술 좋아하던 시인 이태백과 내가 어떻게 비교되는가?

 

 위의 시조는 김천택의 작품이다. 스스로 자신을 주중선(酒中仙)이라 일컬었던 이태백의 장진주(將進酒)에 나오는 싯구 ‘천금의 털옷을 아이시켜 술과 바꾸어 그대와 함께 마시고’가 생각난다. 그런데 스스로 주중선이라고 자기를 부른 이태백도 실제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이중적인 삶을 살다간 시인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이궈원(李國文)이 쓰고 우리말로 번역된 ‘중국 문인들의 비정상적인 죽음’이라는 600쪽이 넘는 책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즉 우리에게는 이태백은 세상 번뇌를 잊고 물따라 구름따라, 부귀영화를 뜬 구름처럼 알고 초연히 살다간 시인이다.

 

 그러나 이궈원은 그도 속으로는 보통 사람의 2, 3배가 넘는 권력욕과 명예욕을 가지고 끝없이 권력과 명예를 동경하였으며 세상을 하직하는 그날까지 권력 주위를 맴돌며 권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버리지 못한 이중적인 삶을 살다간 시인으로 적혀 있다.

 

세상이 번우(煩憂)하니 강호로 나가스라

무심한 백구야 오라하며 가라하랴

아마도 다툴 이 없음은 다만 여기인가 하노라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번잡하니 강호로 나가자. 무심한 백구들이야 오라 가라 하겠는가. 아마도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다툴 일 없는데는 여기 뿐인가 하노라. 김천택의 창작이다.

 

 위의 시조는 2019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한쪽에서 ‘이것이 옳다’ 하면 또 한쪽에서는 ‘저것이 옳다’ 하고 도대체 바른 길, 옳은 길이 무엇인지 서로 자기 것만 옳다고 주장하니 온 국민이 정도(正道)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산다.

 

 나라의 원로라 불리는 노인들은 공연히 한마디 했다가는 망신만 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고, 젊고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은 어느 쪽에 붙는게 더 유리할까, 눈치만 보고 소위 학자라는 부류의 사람들은 이 기회에 방송이나 언론에 이름 한번 내려고 온갖 달콤하고 꿈같은 헛소리를 늘어 놓기에 바쁘다.

 

내게 좋다 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 의(義) 아니면 쫓지 마라

우리는 천성(天性)을 지키어 삼긴대로 하리라

 

 내가 좋아한다고 남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말며 남이 한다고 옳은 일이 아니면 따라 하지 마라.

 

 위의 시조 저자 변계량은 호는 춘정(春亭)으로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 이색과 권근의 문인이었다. ‘태조실록’ 편찬에 참가하였고 ‘기자묘비’ 등을 편찬했다. 춘정은 4살에 옛날 시를 외우고 6살에는 글을 지었고, 17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다. 태조부터 세종까지 20여년 가까이 대제학을 맡으며 외교문서 등 문장과 관계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관인문학(官人文學)의 전통을 잇는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이렇듯 존경받는 학자이자 관료이지만 아내의 일과 누이의 일 등 집안 문제로 근심 걱정이 떠날 날이 없었다. 춘정의 바로 위 누이는 청상과부가 되었는데 행실이 좋지 못하여 집안의 종, 중들과 사통을 거듭하다가 발각되어 결국은 사형되었다. 춘정은 여자복이 없는 사람이었다. 부인을 넷이나 얻었지만 다만 첩에게서 아들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춘정은 옹졸하고 편벽한 성품으로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지극히 인색하고 괴팍했다. 예로 음식을 먹다가 남기면 그 자리에 표시를 해 뒀다가 나중에 자기가 그것을 되먹는, 썩어서 버릴지라도 남은 못주는 그런 ‘짠돌이’였다고 한다. 그의 스승 이색과 권근에 비해 품격이 떨어지고 내용도 허약하다는 평을 받았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가을 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네. 낚시 던져도 물지를 않네. 마음없는 달빛만 가득 싣고 빈 배를 저어 돌아오는구나. 월산대군의 시조이다. 말할 수 없이 외롭고 쓸쓸한 정서가 감도는 풍경이다.

 

 한시(漢詩)에 夜靜水寒魚不食 滿載空載月明歸(밤은 고요하고 물은 찬데 고기 아니무네.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노라). 나는 위의 한문 시구가 퇴계(退溪) 이황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는데 퇴계 말고도 고려 떄의 ‘어부가’로 적혀 있는데도 있었다.

 

 작가 월산대군은 조선 제7대왕 성종의 친형이다. 순서로 따지면 6대 예종의 뒤를 이어 7대 왕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7대는 월산대군이 아닌 동생 자을산군이다. 내력은 이렇다.

 

 예종이 갑자기 죽고 예종의 맏아들 제안대군이나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이 예종을 이어 왕위에 올랐어야 했다. 그러나 12살의 자을산군이 왕으로 지목되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것은 장인(丈人)들이었다. 월산군의 장인 박중선은 신 공신 출신으로 한명회의 구 공신과 갈등관계에 있었다. 궁중세력의 대표인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와 공신세력의 대표인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가 결탁해서 월산대군의 동생 자을산군을 왕위에 추천한 것이다. 요샛말로 하면 정희왕후와 한명회 그룹이 짝짝궁이 되어 변칙으로 자을산군을 임금으로 밀어 붙여버린 것이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임금 자리에 앉게 된 자을산군 성종은 뒤늦게 75명의 공신을 책봉해 그들 지원에 보답하였다.

 

 왕위 계승에 공신이 있었다는 것은 무슨 변고랄까. 변칙이 있었다는 말이다. 태종이 왕위에 오를 때도, 세조가 단종을 밀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을 때도,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중종이 앉을 때도,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자기가 왕위에 앉을 때도 수십 명의 공신이 배출되었다. (2020. 4)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