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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섬 달 밝은 밤에
leed2017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는 나의 애를 끊나니

 

 한산섬 달이 밝은 밤에 망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동안 어디서 퉁소소리가 내 창자를 끊어내는 것처럼 애처럽게 들려 오는구나.

 

 대한민국 땅에서 사는 사람치고 이 노래의 작자, 이순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명장이다.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후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재적인 신출귀몰의 작전으로 왜의 함대를 대파하였다. 말 그대로 백전백승의 전적. 그 공으로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원균의 질투와 모함으로  1597년 이순신도 하옥되었다. 정유재란 때 노량에서 퇴각하는 왜군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이순신은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 한시 등을 남겼다.

 

 1982년 어느 봄날 대구대학에 집중강의를 하던 시절 한산도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이순신의 유적을 만든 것을 보았다. 유적의 핵심인 수루를 크게 지어 그 앞에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이순신의 시조를 써서 대문짝 보다도 크게 적어 놨다. 농구장 보다 약간 더 큰 수루(戍樓). 수루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망루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망루를 한산도에서 본 셈이다.

 

 이순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선 이순신은 풍채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순신과 같은 해에  무과에 급제한 고상안(高商顔)에 의하면 “순신은 말과 논리와 지모가 남을 진압할 만한 재주나 용모가 두텁지 못하여 관상은 입술이 말려 올라간 듯 뒤집혀 복장(福將)은 아니었다”라고 그의 ‘태촌집’에 썼다.

 

 이순신은 임진왜란과 운명을 같이 한 장수다.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년)에 일어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두 가지 오해가 있었다. 첫째는 일본이 4월13일 느닷없이 부산을 공격했다는 것. 둘째는 조선통신사 부사로 간 학봉(鶴峰) 김성일이 “일본은 절대로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보고를 받고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임금 선조는 일본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정보를 한 차례도 아니고 여러차례 받았으며 그 나름대로 전쟁 준비를 많이 했다. 이순신을 발탁한 것부터 대장 신립과 이 일을 여러 도에 보내서 병비를 순시토록 하였다. 이 모두가 전쟁 준비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신립을 삼도 순변사로 삼았다. 그러나  문제는 신립이 대권문 밖에서 직접 무사를 모집했으나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기득권층의 양반 사대부들은 병역 의무 대상에서 면제되는 현실에 왜 그들이 목숨을 걸고 체제를 위한 싸움에 참가하겠는가.

 

 유성룡이 모집한 장사 8천 명을 신립에게 넘겨준게 조선 병력의 전부였다 한다. 임금 선조는 평양으로 도망가서 중국으로 도망갈 궁리만 해서 유성룡이 협박하다시피 선조를 나라 밖으로 못나가게 했다 한다.

 

 이 꼴의 조선이 16만 명의 싸움꾼인 왜군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었을까. 사학자 이덕일은 다음 세가지 요소를 들고 있다. 첫째는 의병의 봉기, 둘째는 이순신을 필두로 한 조선 해군의 백전백승, 셋째는 명군의 참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순신의 전공을 자세히 밝힐 필요는 없다.

 

 이순신은 날마다 전쟁준비, 어머니 걱정, 부하들 걱정에 잠 못 이루고 소화불량, 호흡기 질환으로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룰 때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튿날 싸움에서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를 외치는 표범으로 변하여 앞에 서서 부하들을 독전하였다. (임진 8월15일)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져서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19일) “저녁에 광양현감이 진주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명부를 보내왔다.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당시 영의정 서애(西厓) 유성룡의 천거로 현감에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다. 그는 동인의 추천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원균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순신은 끝내 모함으로 직함, 계급을 모두 빼앗기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유성룡의 변호로 간신히 풀려난 후 백의종군 하였다.

 

 이순신을 대신한 원균은 무모한 전술을 구사, 칠천량 해전을 시작으로 패배를 거듭하다가 자기도 전사. 남은 것이라고는 전선 12척 뿐이었다. 왜군을 대적해 싸울 의지도 용기도 없는 조선 조정은 아예 수군을 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통곡할 상황에서 이순신을 “신이 아직 살아있고 전선 12척이 남아 있으니(微臣不死尙有十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 수군을 허수롭게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라는 눈물의 장계를 올린 후 330척을 명랑해전에서 대파하였다. 이를 생각하면 그에게 성웅(聖雄)이란 말은 열번을 해도 모자란다.

 

 당시 전쟁 영웅에 대한 질투와 모함은 도를 넘었다. 이순신의 죄를 떠들고 모함한 것은 동인 서애 유성룡을 때려잡기 위한 것이었다. 의병을 일으켜 말할 수 없이 큰 공을 세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는 모든 일에 실망하여 영영 세상을 등지고 숨어 버렸다. 광주의 김덕령 장군은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죽었다. 나라 일에는 관심이 없고 서로 밀고 당기는 당파 싸움에만 바쁜 인간 구더기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중앙무대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임금이 뒤에서 “이순신 장하다”고 칭찬 한번 했던가, 재상들이 밀어줬던가, 졸개들이 박수를 쳐 줬던가, 어디까지나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그가 가신지 400년이 넘었다. 그동안 이 겨레의 큰 별이 되어 보석같은 빛을 내뿜고 있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끝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분이나니 끝 물 없어 하노라

 

 봄 산에 불이 나니 채 피지도 못한 꽃들에도 불이 붙는구나. 산에 붙는 불은 끝 물이라도 있지만 이내 몸에 연기도 나지 않는 불이 나니 끝 물조차 없구나. 아, 이 절박하고 답답한 심정을 어이 할꺼나. 이몽학의 모반에 연루되어 잡혀서 모진 고문을 당하던 그 억울함과 호소할 데도 없었으니 그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그런데 김덕령 장군이 이몽학의 모반에 연루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 틈을 타서 왕의 종친이면서도 서자인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켜 선조 30년(1597년) 충청도 홍주선을 쳐들어온 사건을 말한다. 당시 홍주 목사였던 홍가신은 박명헌 등과 함께 이몽학의 난을 진압했다. (202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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