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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항(閭巷) 시인
leed2017

 

 조선조는 시(詩)를 써서 생계를 꾸려가는 의미의 전문 시인은 없었다. 그때는 시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존경받는 세상이 아니었다. 시는 어디까지나 양반의 전유물-. 통치자든 유일한 출셋길인 과거에 등과 한 사람이든 아니든, 글깨나 한 사람이면 누구나 시를 쓸 줄 알아야 했기 때문. 증인이나 천민은 어깨너머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서 증인이나 천민 계층에서 뛰어난 시(詩)적 감각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들이 마음을 모아 갖가지 시회(詩會)를 열었다. 이를 가리켜 여항(閭巷)문학이라 한다. 요샛말로는 '서민문학'이라는 말이 가장 가까운 말일 게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과 그의 누나 난설헌(蘭雪軒) 허초희 남매의 시(詩) 스승이요, 최경창, 백광훈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던 손곡(蓀谷) 이달을 여항문학의 비조(鼻祖)로 꼽는 이가 많다.


 본격적인 여항시인으로는 유하(柳下) 홍세태를 꼽을 수 있다. 효종 때 태어나 숙종, 영조 때 이름을 날리던 홍세태는 그의 어머니가 종으로 천민 출신. 어떻게 해서 시(詩)를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시 임금이던 숙종, 영조의 귀에까지 들어가 그들의 사랑을 받았다.


 안대희 교수를 따르면 유하는 시를 잘 지은 덕분에 어느 권세가의 도움으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작은 벼슬자리도 하나 얻었다. 그의 노력을 본받아 도회지 뒷골목의 서민들도 무도 책을 구해서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하니 그의 영향력은 참으로 대단했던 모양이다.


 유하는 타고난 신분 때문에 평생을 울분으로 지내다가 죽기 전 자기 작품을 모두 모아 편집해서 자서(自敍: 자기가 자기 자신의 일을 서술하는 것)까지 써두고 부인에게 자기가 죽으면 이 문집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이들 여항문인들이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겠지만 속으로 그들이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기득권 양반사회에 대한 분노와 원망, 불만과 서러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다시 안대희 교수의 힘을 빌려 유하의 늙어가는 말을 소재로 쓴 시(詩) 한 수를 보자.

 

 


시골 마을에 늙은 암말이 있다네
태어날 때는 천리마 망아지였지
남다른 점 보지 못한 촌사람들
앞 다투어 빌려다가 달구지 끌게 하네
.….
서울에는 넓고 큰 길 있건마는
이 말은 촌구석에 처박혀 있네
(田家有老牝 . 此馬終邨墟)

 

 

 빼어난 자질이 있으나 세상에서 인정을 받아보지 못하고 늙어가는 말의 처지에 자신을 빗대어 신세타령, 울분을 토해놓은 것을 엿볼 수 있다.


 여항문인들이 자취를 감춘 지가 벌써 오래다. 양반-천민 구별도 없어졌다. 시나 산문 따위의 글이 배운 자만의 전유물이던 시대도 지나갔다. 바야흐로 문자 공용의 시대. 누구나 시를 쓰고 누구나 산문을 쓰니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 세상이 되었다.


 지금은 민주화의 시대. 개인의 능력만 있으면 수십 층 고층 건물의 주인도 되고, 심지어 청와대 주인도 꿈꿔볼 수도 있다. 계급간 차별도 옛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이 해가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다름 아닌 요즈음 심해지는 서울과 지방 간의 차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차이가 옛날 여항문인과 지배층 양반문인의 차이와 비슷하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서울은 대한민국 모든 것의 중심. 대한민국 안에 서울이 있는게 아니라 서울 안에 대한민국이 있다. 뭣이든지 서울이 최고, 지방이면 2류, 3류를 면치 못한다. 대학이 그렇고, 문학 예술이 그렇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과 희망은 요새 와서 지방 문단이 활기를 디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잠잠하던 지방문학 활동이 활발해져 간다. 전주, 강릉, 청주, 경주, 안동 그리고 광주 등 실로 무수한 도시에서 시(詩)나 산문을 쓰는 문학회가 생기고 그들이 발간하는 문예지도 읽기가 바쁘다.


 그러나 걱정도 있다. 시(詩)건 산문이건 글을 쓴다는 것은 얘기도 못 들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문집을 보내 올 때면 불안한 생각이 든다. 대필(代筆)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 얼른 떠오르기 때문이다. 여항문인들은 자기들의 문학적 욕구도 발산하고 또 자기들이 얼마나 탁월한 문학적 재질이 있는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시회(詩會)를 가졌다. 오늘날 글 쓰는 사람들 중에서 남이 쓰니까 나도 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랴.(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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