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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
leed2017

 

 우리는 여러 가지 일로 운다. 배우자를 잃었을 때는 물론, 자신이 서러운 일을 당하거나 남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운다. 흘러간 옛 노래가 나오는 [가요무대]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비 내리는 고모령"이나 "불효자는 웁니다" 같은 애조 띤 노래가 나오면 금시 손수건을 찾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꼭 슬픈 일을 당해서 우는 것만은 아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된다든지, 결혼식장에서 부모에 드리는 인사에서도 신부 되는 사람은 울고(신부가 결혼식장에서 좋아서 너무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것은 철따구니 없어 보인다) 고생고생해서 키운 딸이 신랑의 손을 잡고 손님들에게 인사를 올려도 부모 되는 사람은 눈물을 글썽인다.


 30년, 40년 떨어져 있던 가족을 다시 만나서도 울고, 자녀가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운다. 지금까지 쌓여온 정(情)과 한(恨), 원(怨)과 그리움, 이 모두가 하나로 용해되어 한 방울의 눈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250여 년 전에 태어난 박지원은 복잡한 심리실험실 없이도 이 사실을 스스로 알았다. 그가 중국에 다녀와서 쓴 [영하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칠정(七情) 가운데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만 알았지…까지것 기쁘면 울 수도 있고,까지것 골이 나면 울 수도 있고, 까지것 울 수 있고, 까지것 사랑하면 울 수 있고, 까지것 미우면 울 수 있고…맺힌 감정은 한번 홀딱 푸는 데는 소리쳐 우는 것처럼 더 빠른 방법이 없다.”


 재미있는 것은, 그다지 울 일이 아닌데도 울음을 한번 시작하게 되면 자신의 구슬픈 소리, 자기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 뺨에 흘러내리는 축축한 물기 등이 모두 하나의 자극이 된다. 이 복합 자극 때문에 건성으로 시작한 울음은 점점 심각하게 되고 이렇게 울다 보면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로 내리막길 내려가듯이 나중에는 정말로 설움에 북받쳐 더 열심히 울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울음이 울음을 낳을 뿐 아니라 울음도 웃음처럼 전염이 된다. 사회심리학자들에 따라서는 기쁜 감정 때문에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것이나, 성난 감정 때문에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것은 생리적으로는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당사자가 그 현상이나 사건을 어떻게 이름 붙이느냐에 따라 기쁨도 되고 분노도 된다는 것, 기쁜 것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기쁨이, 억울하다는 이름을 붙이면 분노가 된다는 말이다.


 울음은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한 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 울음은 물, 염분, 단백질, 리피드(lipid)와 당분으로 구성된 눈물을 생산한다. 울음은 우리 신체가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한계가 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생화학자요 눈물박사로 알려진 미국 미네소타에 있는 흐레이(William Frey II) 교수에 의하면 울고 난 다음에 미국 여자들의 85%는 기분이 더 좋아지고 남자들은 이보다 적은 70% 정도가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우리나라에서는 통성기도를 하는 교회에 가서 목을 놓아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고 한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는 “은혜 받았다”고 한다. 남자나 여자들이 12살 전에는 비슷한 정도로 울지만 18살 정도에 이르면 여자가 남자보다 1배 반 정도 더 자주 운다고 한다. 용감무쌍해야 할 사내가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나약한 행동의 노출이라는 문화적 세뇌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 남자가 울어도 좋다는 것을 가르치는 사회는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는 정도에도 문화적 차이가 있다. 북미보다는 구라파 사람들이 더 많이 울고, 구라파 사람들 중에서도 이태리 사람들이 더 많이 운다. 한국 사람들은 어떨까? 내 생각으로는 이태리 사람 못지않게 눈물과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전을 보면 유난히 우는 장면과 먹는 장면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는 데도 죽기 살기, 그야말로 젖먹는 힘을 다해서 운다. 가족 중에 사별(死別) 같은 갑작스런 비극을 당해서 우는 것을 보라. 옆에 두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우는 장본인은 그야말로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죄송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악을 바락바락 써가며 운다.


 북미 사람들은 울 때도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2002년에 뉴욕에서 세계무역센터 비극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 유가족들이 우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울어도 손수건만 눈에 갖다대고 흐느끼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워밍업(warming-up)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점잖은 말로 하면 신사적이고, 교양 있게 운다고 할까. 화끈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교양이고 신사적이고 모두 저리 가라다. 우리는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애절하고, 정성을 다해서 운다. 지진강도를 말해주는 리히터(Richter) 척도로 말하면 북미 사람들이 2.0이라면 우리는 0.9의 강진이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극과 극에 치우치는 경향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세계의 문화와 노력]이라는 책을 쓴 홉스테드(Hofstede)라는 사람의 주장을 따르면 불확실한 것을 잘 참는 사회가 있고, 불확실성을 잘 참지 못하는 사회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불확실한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사회에 속한다고 한다.


 그런데 불확실한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사회는 모든 것이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다는 것이다.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있는 최준식 교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종교를 믿는 것을 보면 홉스테드가 말한 극으로 치닫는 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믿는다는 것이다. 설교를 듣고 찬송 몇 곡 부르는 것만으로 직성이 풀리지 않아 울부짖으며 통성기도를 하고 방언(放言)을 한바탕 하고나야 속이 후련하고 은혜 받았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열심히 운다는 말은 그만큼 감정의 기폭이 넓다는 말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어느 정도 감정 기폭이 있어야 “사는 맛”이 난다고 생각한다. 흥분한 일도, 슬퍼할 일도 없는 사회에서 산다고 가정해 보라. 춥고 더운 기온 변화가 없는 데서 사는 것 같아서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북미대륙에서 오래 산 우리 교민들을 보면, 좀 과장된 표현을 빌리면 방금 병석에서 일어난 환자처럼 맥이 풀려있다. 그러나 흥분할 일도 많고 슬프고 분한 일도 많은 한국 같은데 살면 늘 깨어있는 사람이 된다.


 웃음의 반대는 울음이고 울음의 반대는 웃음이다. 모든 사람들이 노산 이은상의 노래처럼 “마음에 색동옷 입혀 웃고 지내기”를 원한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한 세상 살아가는 데는 눈물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고. 가끔 아무도 없는 데 가서 혼자 실컷 울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20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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