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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물고기
leed2017

 

 내가 아침저녁 산책을 가는 들판 길 옆에는 우리 동네의 하수를 험버(Humber) 강으로 내보내기 위해 설치한 하수구 바로 앞에 소[牛] 외양간만한 웅덩이가 하나 있다. 그 하수구는 지름이 남자 키보다 훨씬 더 큰 점보 하수 파이프를 놓고 그 위는 잔디로 덮고 밑으로는 하수가 흘러나오도록 되어 있으니 그 파이프 관 입구에는 자연석으로 생긴 커다란 웅덩이가 있다. 웅덩이는 일년에 대여섯 번은 더러운 물로 꽉 차 있으나 보통은 어린아이 무릎 정도 깊이의 맑디맑은 물로 차 있어서 바람이 없는 날은 웅덩이 밑바닥이 어항처럼 훤히 들여다보인다.


 산책길에 나서면 나는 웅덩이 위에 서서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그 웅덩이에는 수백 마리, 아니 수천마리의 엄지손가락만한 물고기들이 바글바글 헤엄치며 놀고 있다. 큰 호수는 고사하고 큰 강물에서조차 헤엄 한번 쳐보지 못한 이 딱한 물고기들은 비가 오면 험버강으로 이어진 실개천이 불어날 때 기회를 포착, 험버강으로 탈출, 망망대해 온타리오 호수로 나갈 수 있으련만 그럴 용기나 지혜가 없는 바보들인지 그저 이 웅덩이가 천국인 줄 알고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유년시절을 낙동강가에서 보냈기 때문에 유난히 물고기에 대한 애착과 호기심이 많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 거울같이 맑고 고요한 웅덩이에 침을 '퉤'하고 뱉어서 침 덩어리가 물 위에 뚝 떨어졌는데도 이 물고기들은 우르르 몰려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빵부스러기를 던져봐도 마찬가지-. 보통 공원 연못 같은 데 있는 물고기들은 뭐라도 던지면 일단 피라미드 모양을 만들며 우르르 몰려드는데 내 산책길 옆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들은 음식을 던져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왜 이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만 그럴까.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극히 상식적이다. 이 웅덩이의 물고기들은 하수구 앞에서 살고 있으니 먹이가 언제나 풍부하여 먹이를 위한 경쟁은 전혀 없다. 자기들의 생존을 위협할 천적(天敵)도 없으니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는 일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오가며 먹이를 던져주는 사람도 없고, 낚시나 그물로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도 없는, 한마디로 박근혜의 안보상태, 변화와 자극이라곤 없는 상황에서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 싶다. 비단 물고기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동물이 다 그렇지 않을까.


 내 생가(生家) 역동 집에 20년 넘게 살고 있는 K씨네는 개를 서너 마리 키운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낯선 사람을 보고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 짖지를 않는다. 워낙 사람 왕래가 드문 곳에서 태어나서 자란 녀석들이니 짖는 버릇을 배우지 못해서 그 기능을 영영 잃어버린 모양이다.


 물고기건, 개건, 사람이건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의 자극과 변화는 필수적이다. 예로, 유아기에 특성 자극과 경험이 결여된 상태에서 자란 동물들이 어른이 되어서 주위 환경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하더라도 그 결정적인 시기를 놓쳐버리면 영원히 그 기능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는 주장이다.


 예로, 유아기 때부터 말을 할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말을 배울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를 놓쳐버린 아이는 영영 말을 배울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 사람의 경우 흑인도 남부에 사는 흑인보다 북부에 사는 흑인들의 지능지수가 더 높다. 물론 애당초 지능지수가 높은 흑인, 다시 말하면 '좀 깨인' 흑인들이 변화와 자극이 적은 남부를 떠나 생활환경이 복잡한 산업지역 북으로 가서 그렇다는 해석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앞못에 든 고기들아 뉘라서 너를 몰아다가 넣었기에 들었느냐/북해 맑은 물을 어디 두고 이 못에 들어왔느냐/들고도 못 나가는 정은 네오내오 다르랴"


 한번 들어오면 평생을 그곳에서 보내야 하는 궁녀 자신의 운명과 연못 속의 물고기와 비슷한 운명을 슬퍼하는 노래다. 평생을 임금님과의 하룻밤을 기다리며 청춘을 빼앗긴 궁녀의 신세보다는 내 산책길 옆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들의 팔자가 더 상팔자가 아니겠는가.


 궁녀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도 마찬가지. 번잡하고 큰 곳에 살며 "내가 강호 천지를 누비며 산다"고 생각하는 것과 심심산골에 파묻혀 평생 100리 밖 세상은 구경 한번 못해보고 살면서도 "여기가 내 세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서로 무엇이 다를까? 오늘도 내 산책길 옆 웅덩이에는 수천 마리의 물고기들이 모여 오순도순 살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그 거실만 한 웅덩이가 전부. 이들이 천적(天敵)을 걱정하랴, 주거 공간을 불평하랴, 인간의 횡포를 걱정하랴,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랴.


 이 물고기들은 오가면 먹고 자는데 방해할 이도, 먹고 자는데 간섭할 이도 없는 곳에서 태평으로 살고 있으니 그야말로 완전 자유 천지!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들은 장작개비 하나에 실려 강물에 떠내려가는 개미 한 마리가 자기는 지금 거대한 통나무 조각을 운전해 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는가. 사람도 마찬가지, 착각은 때로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착각은 꿈의 현실, 희망의 종착역일 때가 있는 것이다. (201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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