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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leed2017

 

 캐나다 달력으로 3월 12일, 제법 쌀쌀한 날씨에 곳곳에 쌓였던 눈이 아직 완전히 녹질 않고 있으니 봄이 왔다는 것은 성급한 말이다. 지난 몇 주까지 그렇게도 춥던 날씨가 요 며칠 사이에 확 풀려 버렸다. 봄이 왔다고 크게 외치고 싶을 정도로 화창한 날이다.


 오늘은 아내의 여고 동창생들이 모여 점심을 먹는 날. 벌써 20년 넘게 사모님을 모시고 다니던 이 늙은 운전기사는 바쁘다. 모임에 가는 길에 수필 원고를 복사해서 우편국에 들러 한국으로 보내야 한다. 그래서 아침 운동도 빼먹고 일찍 차를 몰고 나왔다.


 거리에 나와 보니 와, 벌써 봄빛이 천하에 가득하네. 날씨는 꽤 쌀쌀하게 느껴지지마는 햇빛은 벌써 "나 여기 왔어요." 하고 인사를 하는 것 같다. 봄은 햇빛과 함께 온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등은 봄을 알리는 전령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봄의 전령사는 바로 햇빛이라고 생각한다. 여름의 전령사는 글쎄 신록이나 구름이요 가을은 하늘, 겨울은 바람일 게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단연코 봄에 관한 노래가 많다. 내가 가진 세광음악출판사에서 펴낸 동요집에는 1,200곡 중 봄에 관한 노래가 29~30곡으로 제일 많다. 노랫말을 보면 개나리, 진달래를 비롯해서 제비, 아지랑이, 나비, 바람, 봄비도 등장한다. 어린이들의 노래라 그런지 대부분 즐겁고 신나는 노래들이다.


 그러나 어른들이 부르는 예술가곡이나 대중가요로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술가곡에는 봄을 노래한 숫자도 의외로 적거니와 노랫말도 무척 애상적이다. 예로, 박화목,운용하의 <보리밭>도 알고 보면 지난날을 회상하는 추억의 노래다. 대중가요로는 손로원, 박시춘의 <봄날은 간다>도 콧등이 시큰해올 정도로 애잔하지 않은가.


 내가 봄빛 혹은 봄날에 얼마나 반했는지는 은퇴 잔치나 팔순 잔치에 지어 써 드린 시조에서 잘 나타난다. 예로, 내가 E여대 심리학과에 있을 때의 동료 교수 L씨가 정년이 되었다. 나는 캐나다로 돌아오기 전에 모두 3연(聯)으로 된 시조 한 수를 지어 용비어천가체로 써서 L교수에게 드렸다. 시조의 마지막 연(聯)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인생은 녹수 만리 돌아보면 청산인데
쉬었다 가는 길 옛날 안고 가는구나
미리내 연연한 빛아 봄날처럼 사옵소서

 

 '봄빛'이라 할까 '봄날'이라 할까 며칠을 두고 망설였다. 이 노래에서 봄날은 정(情)이요, 사랑, 건강이요, 회억이다.

 

바람이 눈을 몰아 산창에 부딪치니
찬 기운 새어 들어 잠든 매화 침노한다
아무리 얼우려 한들 봄빛이야 앗을소냐

 


 주옹(周翁) 안민영의 노래다. 요새같이 온 나라가 보수.진보로 갈려 싸우고 좌파 종북 세력들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느니, 보수 우파 정권이 부패의 극치에 이르렀느니 하는 말들이 떠돌아 다니는 세상에 이 노래는 좋은 이용물이 될 수 있다. 즉 위의 시에다 요상스럽고 자기편에 유리한 해석을 붙여 우파는 좌파가, 좌파는 우파가 자기들을 해치려 든다고 하면 정치인 몇 사람이 경찰서를 다녀올 수도 있는 노래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과 그의 아들(후일의 고종)의 한결같은 보호 아래 예술의 혼을 마음껏 불사르던 주옹에게는 좌파도 없고 우파도 없었다. 겨울 가면 봄이 오고 매화는 피고 만다는 천도(天道)의 순리를 노래한 것뿐이다.


 봄은 우선 빛의 변화에서 느껴진다는 말을 했는데 해놓고 보니 과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할 때를 생가해보자.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르지 않은가. 벌써 40년이 넘은 일이다. 런던에 있는 웨스턴 온타리오대학교에 처음 갔을 때다.


 동료 교수 중에 아내를 잃은 지 3년이 채 안 되는 홀아비 교수 H씨가 있었다. 한번은 우리 집에서 큰 파티가 있었는데 대학원 여학생 C여사도 왔다. 당시 C여사는 남편이 대학교 교목으로 있는 유부녀. 그런데 문제는 H와 C간에 눈이 맞은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아내가 던지는 깜짝 코멘트, "아무래도 C와 H가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아요." 이 말을 들은 나는 아내를 야단부터 쳤다. "무슨 소리, C의 남편이 대학교 교목이고 하루건너 한 번은 C에게 점심 사주러 차를 몰고 우리 과에 오는데." 


 C는 이혼, 재혼의 절차를 밟아 둘은 부부가 되어 재미있게 살고 있다. 아내는 어떻게 C와 H의 관계를 알았을까. 둘이 서로 보는 눈빛이 다르더라는 것이다.


 빛은 사랑이요 정열이다. 빛은 미래요 희망이다. 봄은 빛에서 오고 빛은 봄을 남겨 두고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2015,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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