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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고 노래만 남아
leed2017

 

 누가 나보고 타고난 능력이랄까, 적성이 없는 분야 셋만 들라면 나는 주저 없이 운동, 미술, 음악 순서로 꼽겠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다닐 때까지 운동은 학급 대표는 물론 분단 대표로도 나가본 적이 없는, 늘 앉은 자리만 지키는 '망부석 도사'였다. 미술도 별로 다를 것은 없다. 초등학교 때 잘된 미술작품은 교실 뒷벽에 붙이는데 한번도 내 작품이 붙여져 본 적이 없다.

 

 

 


 음악은 어려서부터 음악이 금지된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커서도 뽕짝밖에는 아는 게 없다. 색소폰을 배우느라 연습을 할 때마다 '내가 보기 드문 박자치(拍子痴)로구나.'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고등학교 때는 합창반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자신이 없어서 스스로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노래를 배우고 싶은 열망은 있었던지 대학교에 다닐 때는 나운영 교수한테 가서 배웠다. 그것도 내가 주동이 되어 간 것이 아니라 친구 몇이서 간다기에 나도 따라나선 것뿐이다. 그 소중한 기회를 일 년을 채 못 채우고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나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고 부엌 개 삼 년에 라면을 끓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나도 하면 언젠가는 물리가 터지겠지 하는 믿음 하나로 어지간히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색소폰을 배웠다.


 2014년 10월에는 토론토로 이사 온 후로 세 번째 색소폰 음악회를 가졌다. 음악회는 나와 파트너 M교수가 반반씩 나누어 독주, 혹은 이중주를 하는 그런 전형적인 프로그램. 주위에 취미로 노래를 부르는 몇몇 애호가들이 우정 출연을 해주었고, 한국에서 어느 큰 방송국 관현악단 단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H형도 우리들의 지도선생 자격으로 무대에 서 주었다. 나는 내 실력은 생각지도 않고 내가 H씨 제자라는 것만 떠벌리고 다니는 그런 문하생.


 2014년 음악회도 어느 큰 교회를 빌려 자못 '성대하게' 벌였다. 연주곡들은 그야말로 '꿀꿀이 죽'이랄까 '해물잡탕'. 샹송(Chanson)과 한국 가곡에다가 대중가요, 그것도 6,70년이나 묵은 뽕짝 등 우리가 잘 아는 노래만 긁어모아 놨으니 마치 우리 음악의 여명기 시절에 <봉선화> 같은 예술가곡과 <황성 옛터> 같은 대중가요 사이에 구별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 꼴이 되었다. 그런데 어쩌랴, 우리 능력이 거기까지인 것을-. 


 그러나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나와 M교수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H형에게는 감탄과 찬사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 주었다.


 H형은 1940년대의 가수 장세정의 <고향초>를 불렀다.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었네/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고/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가뜩이나 슬픔을 머금고 있는 단조의 노래를 H형은 애처로움에 눈물이 고이는 연주를 했다. 


 그 이튿날,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오타와에서 부군과 함께 온 C여사와 N호텔 뷔페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였다. C여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전날 밤 음악회 얘기를 꺼내면서 H씨가 <고향초>를 연주할 때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1947년에 <고향초>를 처음 레코드에 취입한 가수 장세정이 바로 그의 큰언니라는 것. 삼남매가 서로 너무 다정하게 지냈기 때문에 좋은 일, 궂은 일만 있으면 큰언니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큰언니 장세정은 6.25 동란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데다가 그녀의 인기곡 대부분마저 월북작가의 작품이라고 금지곡으로 되어서 자기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없었다. 게다가 지병인 고혈압에 시달리던 언니는 아들이 사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78년 10월 14일, 그녀의 노래를 아쉬워하던 재미 한국인들은 뜻을 모아 '장세정 은퇴 공연'을 개최하여 일세를 풍미한 명가수의 말년을 장식해 주었다 한다. 2003년인가, 장세정은 만리타국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눈을 감았다. 큰언니의 대표작 <고향초>는 자기 결혼식 때 언니 생각을 하면서 동생들이 함께 불렀다는 것이다.


 나는 가수 장세정과 관련해서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멍해지는 감격적인 장면을 하나 간직하고 있다. 지금부터 30년 전이던가, 한국의 '가요무대'가 재미교포 위문공연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연 적이 있다. 그날, 장세정은 거동도 불편한 몸으로 동료가수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가 밀어주는 환자용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나와 청중에게 인사를 하던 감격적이요 두 눈 적시는 것을 본 장면이다. 일세를 풍미하던 명가수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내려앉은 것을 보니 무척 애처로웠다.


 사람은 사람이 만든 노래를 부르며 흥겨워 하고 슬퍼하고 즐거워 하고 애처로워 한다. 그러나 제 아무리 흥겨운 노래를 불러도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대부분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간다. 그러나 노래는 남아서 또 다음 세대를 맞는다. 사람은 늙어도 노래는 늙지 않는다는 말인가.(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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