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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雪]오는 밤의 소야곡
leed2017

 
 이 세상에 눈(雪)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눈이 오면 기분이 좋다. 눈은 대낮에 와도 좋고 한밤중에 소리 없이 소복소복 쌓여도 좋다. 이튿날이 공휴일이면 더더욱 좋고, 젊었을 때 함박눈이 내리는 아침이면 주중, 주말 관계없이 데이트를 약속하기 위해 연인들 전화통에 불이 난다. 고등학교 몇학년 때인지는 모르겠으나 국어 시간에 배운 김진섭의 수필<백설부(白雪賦)>가 생각난다. 그러나 그때는 늘 그랬듯이 대학입학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 입장에서 읽은 것이라 아무래도 글의 아름다움은 별로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맛있는 음식도 약(藥)이라면 그맛의 절반은 달아나 버리는 것처럼-. <백설부>도 그랬다.


 눈은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의 노랫말을 쓰는 동시인의 마음처럼 심성이 곱고 맑다. 나는 어릴 적부터 눈을 좋아했다. 내 생가 역동 집 주위로는 운동장 2,3배 크기의 솔밭이 빙 둘러 있었다. 사랑마루에 앉아서 낙동강 물줄기가 보이지 않으면 자손에게 복이 온다는 어느 풍수의 말을 듣고 강을 가리기 위해서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1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나무들은 아름드리 고목이 되었다. 그러나 풍수가 예언한 그 자손복은 그림자도 어른거리지 않았다.


 어느 겨울이었던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눈이 쏟아져 소나무들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많은 가지가 부러지거나 휘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어머님 18번 애송 시조의 정경(情景) 그대로였다.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 가지 꺾어내어 님 계신 데 보내고져
님께서 보신 후에야 녹아진들 어떠리

 

 

 16살 어린 나이에 4살 아래 소년에게 시집 와서 출가외인(出嫁外人), 그때까지 친정 한번 안 가본 어머님이 소나무 가지를 보내고 싶은 님이 있을 턱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이런 '외설스런'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눈은 비처럼 마구 내리 퍼부어 집이고 사람, 가축을 휩쓸어가는 그런 횡포는 좀처럼 부리지 않는다. 그 행동이 무척 온화하고 부드럽다. 우리 식구가 23년간 살던 온타리오 주 런던에는 눈이 퍽 많은 곳. 워낙 눈을 좋아하다 보니 그 눈구덩이 속에서 겨울을 23번을 보냈는데도 아직도 눈이 오면 좋다.


 눈은 정숙한 숙녀다. 밝고 깨끗하고 포근한 정서가 온몸을 감싼다. 내게 눈은 마음의 때밀이-. 물로 치면 아침이슬이요, 음악으로 치면 동요(童謠)다. 눈에 대한 생각은 나만 이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내 서가에 꽂혀 있는 한국 세광 음악출판사에서 펴낸 동요집을 보니 눈에 관한 동요가 모두 29곡이나 실려 있었다.


 지난밤에는 1시가 조금 넘어 잠이 깼다. 방안이 유난히 환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커튼 사이로 창밖을 내다보니 세상에! 온 천지가 하얗게 되어서 바로 앞 건물도 잘 보이지 않았다. 와, 눈이다. 잠은 확 달아나고 나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어느새 아내도 잠을 깨서 살며시 내 곁에 앉아 있지 않는가. 기분이 좋아서 냉장고 속 깊이 숨겨 놓다시피 한 포도주 한 병을 꺼내서 한잔씩 마셨다. 속으로 "내 정서가 아직은 죽어서 말라붙은 나무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키드득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아직은 죽은 나무가 아니야." "마음은 펄펄 뛰는 활어(活魚)"를 외쳐대도 이제는 눈이 오면 옛날같은 행동은 할 수가 없다.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닌다든가 다방에 가서 커피잔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던 시절은 지나갔다. 더구나 캐나다 같은 '메마른' 사회에서 이런 짓을 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러니 나같은 늙은이에게 남은 길은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회억(回憶) 뿐이다.


 헤아려 보니 지금부터 꼭 55년 전 일. 1960년 겨울,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가 있었다. 드보르자크(Dvorak) 4번 교향곡인지 뭔지를 연주한다고 해서 대학 같은 과 2년 후배인 미스 정을 꾀어내어 함께 갔다. 공연이 끝나고 밖을 나오니 주먹만한 크기의 함박눈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미스 정과 함께 종로로 나와 창경원 앞을 지나 삼선교까지 그 먼 눈길을 걸었다. 그날은 미스 정과 두 번째 만남. 같은 과 2년 선배되는 남학생이라는 사실 말고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도 늦은 밤길에 선뜻 나를 따라나서는 이 간 큰 처녀를 보니 낙동강에서 물고기만 잡고 놀던 이 시골뜨기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대박은 분명 대박. 내가 던진 낚싯밥에 잉어가 걸렸구나 생각하니 미스 정을 등에 업고 청량리까지라도 뛰어갈 만큼 온몸에 기운이 용솟음쳤다. 


 그때 눈 속을 함께 걸었던 미스 정과 나는 부부의 인연을 맺어 유학을 온 이듬해 1967년 봄에 결혼하였다. 미스 정은 올해로 일흔세 살의 바스러질대로 바스러진 노파. 그렇게 봄 미나리처럼 연하고 야들야들하던 사람이 지금은 철 지난 질경이처럼 질기고 억세어졌다. 애당초 내가 속은 것은 아닐까. 눈은 나의 지난날이요 나의 청춘, 푸른 꿈이다.(20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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