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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 선생님들
leed2017

 
 내게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안동' '예안' '낙동강' '청량산' '부포' '늘매' '청고개' 같은 내 정감이 듬뿍 배인 단어들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선생님' 하면 내가 다니던 예안초등학교 시절 H선생님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반 담임 H선생은 키도 크고 성격도 무척 온화한데다가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선생님'이란 단어는 내게 외경심(畏敬心)을 불러 일으킨다. 꾸중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지 싶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국엘 갔다가 H선생님을 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뵙는 것이니 30년 넘은 만남이었다. 어느 초라한 한식집 비좁은 방에서 넙죽 절을 올렸더니 선생님은 나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인간 될 것 같지 않던 아가(아이가) 교수가 되어 왔네." 하시며 내 손을 덥썩 잡는 게 아닌가. 


 교수는 다 인간스러운 줄로 잘못 알고 계시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나는 좋게 보고 하시는 말씀 같아서 우선은 기분이 좋았다. 30년이 지나도 내 이름을 잊지 않으신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이런 일은 서울같은 대도시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몇 십 년만에 만나는 자리에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 하다 싶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느냐고 했더니, 내가 장난이 너무 심해서 좋은 아가(아이가) 되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루는 교실 안을 들여다보니, 내가 반 아이들에게 머리를 수그리고 있으라 하고는 책상 위를 미친놈처럼 뛰어 다니더라는 것이다. 맹세컨대 나는 그런 장난을 친 기억이 없다.


CCTV도 없으니 진상 규명은 퍽 어렵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무서웠으나 그들의 사랑을 받으려는 욕심은 무척 컸다. 어떤 선생님이 내게 잔심부름이라도 시킬라치면 나는 던진 정구공을 물고 오는 바둑이처럼 좋아라 신이 나서 달려가곤 했다. 


 중학교 때는 김일성대학 출신으로 국어를 가르치던 소설가 S선생이 있었다. 문장에 무척 까다롭게 엄격해서 학생들이 무서워했다. 


 내가 보기에 그때 벌써 인생의 중반은 훨씬 지났겠구나 싶은 한문을 가르치던 K선생도 생각난다. 내 생가(生家) 역동에 오셔서 하룻밤 사랑방에 묵으시며 아버님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시던 생각이 난다. 은근히 아들의 한문 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아버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K선생 앞에서 '공연'을 하였다.


 공연 내용은 <소학(小學)>의 맨 첫 구절을 외우는 것이었다. 일곱 살에 <대학(大學)>까지 끝낸 다산(茶山) 정약용 같은 천재도 있는데, 중학교에 다니는 늦둥이가 <소학> 첫 구절을 외우는게 뭐 그리 대단한가. 그러나 아버님은 자식 자랑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평소에는 "뭘 좀 안다고 너무 나대지 마라."고 훈계하시던 아버님은 그날은 달랐다.


 대학 시절 선생님으로는 Y선생이 제일 자주 생각난다. 내가 3학년 때 학장이셨던 Y선생은 행동거지가 무척 개결(介潔)스럽고 단정한 어른이었다. 내가 지금의 아내요 같은 과 2년 후배인 정옥자와 연인 사이로 지내는 것이 못마땅했던지 하루는 미스 정 양(孃), 아니 미래 나의 사모님을 학장실에 불러 앉혀 놓고는, "자네는 그래 사람이 없어 그 깡패 같은 녀석하고 같이 다니나?"하고 꾸짖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Y선생님이 깜깜 모르고 있던 사실은 안동의 이도령을 사모하는 서울 정춘향의 송죽(松竹) 같은 절개. 만약 정 양(孃)이 그 점에서 약간의 문제라도 있거나 Y학장이 도시 출신 멋쟁이 건달을 하나 소개해주는 날이면 난 그날로 끝장, 오늘까지 장가도 못가고 독신으로 있을지 모른다.


 "그 깡패같은 녀석" 뒤에는 다음과 같은 두 사건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은 대학 3학년 때 뒷동산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놀이를 계획했는데 대학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장실에 가서 말씀을 드렸더니 거기에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것. 어리석게도 나는 왜 안 되느냐고 물었다. 역시 대답은 "No." 학장실을 나오면서 "우리는 불을 피우고 말 낍니더." 하는 엄청난 항명(抗命) 메시지를 던지고 나왔다.


 내가 그리 대가 세거나 배짱 두둑한 반항아가 아닌데 그날은 왜 그런 말을 하며 학장실을 나왔을까, 나도 모른다. 세월은 흘러 그 깡패가 일흔 세 살이 되던 해에 전공 분야인 상담심리에서는 세계에서 상담 과정에 대한 연구를 가장 많이 한 20명의 석학 반열에 올랐고, 전공 밖은 13권의 책을 냈다는 것을 알면 그때 병아리 같이 귀여운 두 연인의 애정산맥을 훼방하려는 심술을 부린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한복(韓服) 때문이다. 대학교 때 나는 가끔 한복을 입고 다녔다. 그런데 Y교수가 느닷없이 "여기가 어디 자네 안방인 줄 아나?" 하면서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조선 정조 때 '영남 만인소(萬人疏)'를 두 번이나 올렸던 영남 사림(士林) 후손의 프라이드를 여지없이 짓밟아 버린 Y선생. 그러나 그는 모든 일을 투명하고 품격있는 행동을 강조하여 많은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왜 한복을 입고 학교에 가서는 안 되는지 아직까지도 나는 모른다. 작고하신 지가 20년이 넘었으니 물어볼 길도 없다.


 초등학교 때는 온화한 선생님이 좋았다. 너그럽고 부드럽고, 엄마 아빠처럼 우리를 돌봐주는 선생님이 단연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서는 인품보다는 전공 실력과 강직한 개성이 있는(특히 사회 전반에 비평적이고 반항적인) 선생님을 더 좋아했다. 


 대학교 3학년 때 박정희가 주동이 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그때 대학 분위기는 어수선하여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시간만 허비하고 있을 때 전교생들이 강당에 모여 C교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C교수는 그의 비판적 기질로 이름이 난 분이었다. 


 강연의 대부분은 잊어버렸으나 "민주주의 사회에선 진보나 발전은 있어도 혁명은 있을 수 없다."고 한 말은 아직도 분명히 남아 있다. 선생님으로서 올바른 생각과 태도를 길러 주는 것은 다른 어떤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이다.(2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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