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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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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밀일기(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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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 유니스 윤경남 옮김

 

 

 

 

(지난 호에 이어)
그 빚은 신통하게도 상상에 꼭 들어맞은 일들을 오랫동안 차지해온 것에 대한 갚음인 것이다. 


마르게리따는 우리가 짐을 싣고 차에 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아내는 내게 별로 이렇다 할 충고를 하진 않았으나, 아들에 한해서는, 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해 주었다. 이미 그랬기 때문에 자동차 모터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저 이렇게만 말할 수 있었으리라.


“국경을 넘을 때 조심하세요!”


나는 기아 1단을 넣은 다음에 2단으로 기어를 바꾼다. 


“안녕, 마르게리따!”


우리는 아직도 먼 길을 가야 하므로 나는 알베르띠노에게 공책 제 1권을 꺼내어 큰 소리로 읽어 달라고 했다. 


“우리가 출발한 저 알렉산드리아부터 시작해다오. 내가 그만 읽으라고 할 때까지 읽어야 한다.”


나는 계속 내리는 가랑비 때문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조심스레 차를 몰고, 알베르띠노는 계속 읽어나갔다.

 

 

9월 13일 월요일


우리는 간신히 요리를 하긴 했으나, 식탁에 앉아서 먹을 시간은 없었다. 우리는 짐(만약에 가진 게 있다면)을 등에 지고 집합하려고 헛간 뜰로 갔다. 독일군 중령이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쓴 종이 쪽지를 돌렸다. 


“나는 내 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라도 독일과 새 유럽의 승리를 위해 바칠 것을 맹세한다…”


알베르띠노는 놀라서 읽기를 그쳤다.


“그 당시에 저들이 벌써 새 유럽을 생각하고 있었나요?” 


“그렇단다.” 내가 설명해준다.


“하지만 히틀러의 생각은, 자유 유럽이 오늘날 추구하는 새 유럽과는 관계가 없었다.”


알베르띠노는 계속해서 읽는다.


“그 후로는, 우리가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옮길 때 내용을 알 수 없는 화물차로 몇 백 마일씩 실려가곤 했단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알레산드리아에서 보레메뵈르드까지는 보통열차를 타고 갔는데, 그 기차는 위대한 독일을 위해서 일하려고 독일경계 안에 멈췄었단다.”


베로나(Verona) 에서 우리는 이탈리아 사병들로 꽉 들어찬 화물열차와 다른 화물차 사이에 정거했다. 그 다른 화물차에는 파두아(Padua)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독일로 이송되는 슬라브(Slav) 인들이 탄 무게 화물차였다. 


이탈리아 사병들은 말없이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고 있는데, 그 중의 한 사람만이 로마 액센트가 섞인 비꼬는 음성으로 외쳤다. “거기 계신 장교님네 들이여! 당신네들이 여태껏 생각해 온건 당신네 구두를 반짝거리게 닦는 일뿐이었구먼…”


 슬라브인들도 그들만큼 우리를 증오했으나 침묵을 지켰다. 결국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알고 입을 열었다. 그런 다음 순전히 기술적인 일침을 우리에게 주었다.


“당신네들도 처음 몇 달 동안은 꼬박 굶게 될 거요. 나중엔 익숙해지겠지만.”


알베르띠노는 그것이 정말인지 알고 싶어했다. 그렇진 않다고 대답했다. 일 년 반 후에도 배고픔은 늘 새로운 사실 같았으므로.


민간인으로 꽉 들어찬 기차가 도착하고, 다른 기차는 떠났다. 이탈리아군이 서있던 기찻길 위에, 영국군 포로들의 호송이 뒤따라 들어섰다. 여분의 빵이 있는 것을 우리가 그들에게 건네주었으나 그들은 쵸콜렛만 달라고 했다. 


어두워진 다음 그들은 “티페라리(Tiperary-註: 아일랜드 남부도시. 일차대전 때 Tiperary Song 이 유행했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룹의 활기 있는 태도가 꽤 황당해 보였는지, 우리를 맡고 있는 독일군 하사는, 몇 달 이내에 전쟁은 끝나고 독일은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9월15일 수요일 


기찻길에서 가까운 집 앞과 다른 건널목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추방을 당한 형제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나온 것이다. 늙은 부인네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의 아들은 줄리아 사단에 있다가 전사했다면 


서, 우리가 지나갈 때 팔을 내밀었다. 이러한 몸짓과 눈물 어린 눈동자는 끝없는 절망을 되새기고 있었다. 


베네또(Veneto)로 가는 동안 우리는 줄곧 무관심 상태이거나 증오의 대상이었는데, 이곳 이탈리아 북동부 한 구석에선 진정한 기독교적이고 인간적인 분위기를 맛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신네 장교들” 혹은 “착취자와 모리배 자식들”이 아니고, 국외로 나가는 길에 오른 형제들일 뿐이었다. 포로들을 태운 기차가 이 길을 연이어 지나갔으련만, 이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무엇이나 편의를 제공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에게 빵과 사과와 피우다 남겨둔 담배를 몽땅 주겠다고 제의했다.


바실리아노(Basiliano)에서는 어떤 여성이 물이 가득 찬 물동이를 들고 기차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역을 따라 뛰어가며, 손수건이나 속옷을 빨 사람이 있으면 기차가 떠나기 전까지 재빨리 빨아주곤 했다. 그녀의 열성과 재빠른 동작은 정말 가슴을 찡하게 해주었다.


우다내(Udine)에서는 한 어린 소년이 창문으로 어름 조각을 내 손에 쥐어주면서, 어린 몸인데도 잊을 수 없는 한 마디를 함께 보냈다.


“우린 모두 같은 사람이에요.”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하얀 콧수염을 기른 늙은 역장이 우리 앞에 나타나 거수경례를 했다.

 

 

9월 1 6일 목요일


이탈리아 기찻길을 따라 이렇게 여행하면서도 우리는 얼만큼 가고 있었는지 거리를 측정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십여 개의 외국도시를 지나간 다음이라고 해도, 밀라노(Milano) 혹은 뽈로니아(Bolog.na)와 비슷한 윤곽을 가진 도시를 보았다고 해서 놀래선 안 되었다. 


우리가 잘즈부르그(Salzburg)를 향해 가고 있을 때, 오스트리아의 푸른 들판과 꽃이 만발한 정원은 우리가 살던 집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충실한 나의 일기여!


날씨는 여전히 어둡고 비가 내리는데 우리는 타르비소에 도착했다. 그래도 오스트리아는 우리에게 또 한 번 호의적인 환영을 해주었다. 오스트리아의 요새와 세관은 이탈리아 측에 비한다면 빈약한 인사 배치라고 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오버코트 깃에 유난스레 눈에 띄는 헝겊 조각을 댄 신사복 차림의 두 사람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복 차림을 한 사람이 내게 곁눈질을 한다. 내가 여권을 내 보이기 전에 수동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기계는 항상 나를 앞지르니까!). 그래서 차는 경사 때문에 받침대를 넘어 앞으로 굴러간다. 


알베르띠노가 6인치 이상 더 구르기 전에 사태를 수습한다. 그러나 세관원은 내가 자기의 모깃소리만 하게 작은 음성을 듣게 될 즈음엔, 당황하며 화를  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여권을 들여다 보더니 즐겁게 소리질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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