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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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밀일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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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 유니스 윤경남 옮김

 

 

 

 


 
분뇨통, 4월25일


라게르 수용소 안의 모든 일은 논리적으로 계획이 되어있기 때문에 뚜껑을 열어놓은 분뇨 구덩이가 막사 바로 옆에 붙어있어선 안 된다. 수용소 당국은 2~3일 동안은 그 분뇨 구덩이를 열어둔다. 분뇨통을 채워야 밭에 비료를 주기 때문이다. 


열 사람도 넘게 그 구덩이의 반쯤까지 빠지곤 한다. 오늘도 어떤 스키대원이 거의 겨드랑이까지 미끄러져 들어갔다. 마치 단테의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는 듯이 보였다.

 


체조, 4월 28일


한 대위가 그의 막사 앞에서 등뼈 운동과 엎드려 허리굽히기 운동과 그 밖의 체조를 하고 있다. 진지한 동작에 위엄 있게 보이는 큰 키와 근육형 몸매, 비잔틴 형 모자이크의 눈매 등은 열성적인 노력에다 엄숙한 이국적 의식마저 보여주고 있다.


매일 아침 막사 앞에서 그 대위는 몇 사람을 모아놓고 그 운동을 한다. 구경꾼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양쪽 팔을 모두 내밀고 말한다.


“저 사람, 틀림없이 미쳤어!”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 안 그래?” 


 “도대체, 원---”


웬일인지 그가 체조하는 모습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들기도 한다. 참다못해 한 친구가 소리쳤다.


“살찌는 게 겁이나 그러시우?”

 

초상화, 4월 30일


 코폴라(Coppola)가 애쓰며 연필로 나를 그려주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듯 내가 나를 보게 되었다. 분명코 옛날의 죠반니노는 아니었다.


 전쟁 전 내 신분증엔 주름살 하나 없고 어둡지도 않은 둥근 얼굴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그 얼굴엔 냉철한 표정과 광고 모델같이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가 있었다. 머리칼은 잘 빗겨져 있고 출렁이는 모습이다. 여러분이 그 당시의 나를 본다면 내가 방금 온천이나 휴양지에서 돌아온 줄로 알 것이다.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 뚱뚱했던 살이 다 빠지고 피부는 건조하다. 이중 턱이 없어져서 확고한 의지가 드러나고 불쾌감을 주지 않는 선을 긋고 있다. 광대뼈가 몹시 튀어나와 골격구조의 기능을 행사하고 있다. 이제 내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덮였고, 내 두 눈은 전보다 더 커졌고, 더욱 능동적이며 생기마저 보인다. 


이제 내 머리칼은 인습에 구애 받지 않고 눈에 띄게 높은 이마 위에 헝클어져 있다. 무겁고 검은 콧수염은 나의 새 얼굴에 마지막 손질을 하면서 너무 큰 콧구멍을 적당히 가려주고 있다. 두툼했던 목덜미는 없어졌고, 내 머리는 내 육신과 분명히 분리되어 있다. 


내 머리칼이 내 어깨에서 자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마을의 백치나 독일사람 같이 보이진 않는다. 내 육체는 모두 젊은 날의 유연한 선을 다시 회복한 셈이다. 헐렁해진 팬티만이 무시무시하게 살쪄있던 지난날을 생각나게 할 뿐이다.


나는 내 외관 자체를 철저하게 싫어해서 유모어 잡지에 실리는 일도 싫어했다. 지금은 나 자신과 잘 화해하고 있고 거울을 드려다 보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해준다.


“여보게, 노인장! 착한 친구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나를 꼭 다시 보고 싶어 할 텐데 말일세.”

 

아마추어 주방장


아마추어 주방장은 요리사라기보다 그릇 수집가이다. 그는 그저 상자들의 총회이고 항아리의 의회이며, 주전자와 냄비의 세계박람회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마추어 주방장은 하나의 개인이 아니고 산업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그가 받아오는 모든 음식재료는 철저히 검토할 대상이므로 세밀한 행동계획까지 세우기에 이른다. 


반죽하는 과정을 여러 번 되풀이 하면서 매일같이 여러 가지 재료와 40개가 넘는 갖가지의 용기를 능숙하게 다룬다. 매일 타는 일정량의 재료를 받자마자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한데 섞기 시작한다. 


소금 약간, 기름 몇 방울, 시럽 약간 뿌린 것, 밤 가루 약간을 섞어 양념한 감자 으깬 것과 빵 부스러기와 마가린, 코코아, 피 묻은 소시지를 가지고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고기빵을 생산한다.


설탕과 우유와 돼지기름과 부이롱 술과 멜린표 아기밥 두 수저와 마미레이드 3 개, 감자, 밀가루를 무와 섞어서 크록케도 만들고 상표 없는 생선 통조림과 차(茶) 재료도 만들어 낸다.


 아마추어 주방장은 인간이 아니고 화학요리법 실험관이다. 그는 하루 종일 두드리고, 반죽하고, 굽고, 휘저어 대고, 튀기고, 지지고, 자르고, 또 요리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하루를 다 보낸다.


저녁 8시가 되어야 겨우 식탁에 앉게 된다. 9시엔 녹초가 되어 잠 자리에 든다. 10시가 되면 그는 자기가 먹은 것을 모두 토해버려야 함으로 잠에서 깨어난다.

 

기적, 5월 1일


혹시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철조망 울타리에 떼지어 몰려드는 사람 가운데 레보라의 노란 웃저고리가 눈에 들어온다. 레보라가 입은 다 헤진 저고리 깃 위로 레보라의 머리가 나타난다. 그 머리는 가느다란 목 위로 오뚝 올라앉아 유난히 커 보인다. 


한쪽 소매 밑으로 레보라의 손가락 끝이 보이고 그 끝엔 분홍빛 나는 보따리가 달랑 들려있다. 요즘 들어 레보라는 세상이 자기에게 무관심한 것에 분개한 나머지 호전적인 음조가 그의 음성에 아직도 남아 있다.


“오늘이 자네 생일인걸 알고 왔지. 이걸 받게.” 하고 그는 죠반니노에게 그 분홍 보따리를 넘겨주며 중얼거린다.


그 꾸러미 속엔 레보라가 배급을 받은 담배가 들어있다. 바람이 불고 모래가 날리고 단조로운 검은 파도가 와서 부딪치는 이 해안가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폭풍에 밀려난 난파선 조각들이 여기저기에 널려있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 기적적으로 형체도 없고 인간성도 없는 더러운 우리 속에서 깨끗하고 순수한 것, 즉 문명의 표시 같은 게 나타난 것이다. 누군가가 그 친구에 대해서 그리고 우정을 나누는 일에 대해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러고는 지저분한 신문지 위에 한 줄의 시를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 레보라는 시인이 아닌가!

 

왜 전쟁을? 5월 7일


러시아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세 포로들이 침상 널빤지를 수리하려고 막사 안에서 왔다 갔다 한다. 독일군 상병이 진두지휘를 하고. 이 네 사람은 자기 나라 말 밖엔 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오랫동안 붙잡고 토의한 후 서로 이해하기에 이른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병들은 늘 이런 식이다. 이것이 오해를 가르치는 문화이다.

 

생일, 5월 14일 


오늘은 내 아들의 네 번째 생일이다. 그에게서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다시 살았다. 이젠 그것을 빼앗겼다. 나의 세월을 세어 보느니 내 아들의 세월을 헤아리는 게 낳겠다. 비록 포로의 몸이지만 시간이 멈추어준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햇빛 없는 봄, 5월 20일


오늘 아침에 놀라운 일이 하나 일어났다. 철조망 울타리의 동편에 있는 넓은 갈색 밭이 갑자기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보리 싹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춥고 기분 나쁘고 햇빛 없는 하늘 아래 씨앗이 번식하는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처럼 그것은 자연의 법칙보다는 인간의 법칙에 순종한다는 말인가?


“볼가, 볼가스.”라고 불러주는 우울한 러시아 병사들이 마치 폭풍이 일고 있는 바다처럼 물결치는 보리밭 가운데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병사들의 머리통들이 수레 기둥에 비틀려 매여 있고 수레지붕 꼭대기는 해변가에 흘러 들어온 난파선의 잔해조각 같기만 하다.

 


절망, 5월 25 일


밝고 조용한 정오에 아무 색깔 없는 하늘 아래, 기하학적인 윤곽을 띄고 서있는 수용소 건물과 삭막한 모래 사이에 선 절망이란 이미 지상의 것이 아니다. 공중에 매달려 내버려진 우리 존재의 빈 공간 속으로 파고 든다.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절망을 들이마시며 산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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