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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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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밀일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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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 유니스 윤경남 옮김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가족’ 삽화

 

 

 

(지난 호에 이어)
 빵과 우유와 치즈와 내 입 속에 그득 괴어오른 군침과 쑤시고 아픈 턱. 몇 시간이 더 지나야 내 턱은 씹는 운동을 해볼 수 있을까? 다섯 시간 지나야 우리는 감자 두 세 개와 무우국 한 그릇을 먹게 되리라. 


당장에 내 뱃속은 그 동안 꿈 속처럼 놀림 받은 걸 알아차리고 전보다 더 격렬하게 아픔을 줄 것이다. 이미 나는 식사 다음에 찾아 올 배고픔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쪽 울타리에서 저쪽 울타리로 걸어가며 나는 턱을 꽉 다문다. 그러나 몹쓸 바람이 해변가에 버린 조가비를 스쳐가듯 내 텅빈 뱃속을 휘익 지나간다. 몹쓸 북녘 공기는 내 몸의 땀구멍마다 스며든다.  

 
나는 텅빈 가방이다. 바람이 그 속에 회오리 친다. 내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배고픔은 뒤따라 온다. 힘을 다해 나는 내 마음을 철조망 울타리 너머로 밀어붙인다. 이른 아침 햇살이 내가 지나간 아침들을 떠오르게 하는 그곳으로.


태양은 멀리 떨어져있는 내 집을 비쳐주고 있다. 알베르띠노가 눈을 뜬다. 두 개의 검은 태양 같은 알베르띠노의 조그만 두 눈이 침대 옆에 붙어있는 푸른 침대 갓을 넘겨다 보고 있다. (지금 철조망 울타리 너머 푸른 보리밭 가운데로 종달새 한 마리가 노래하며 하늘로 치솟고 있다. 퍼덕이던 날개를 접고 노래를 계속하며 바람을 안고 미끄러지듯 날고 있다.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은 반짝이는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듯, 수정 같은 꽃이 꽃잎을 활짝 펴는 모습 같기도 하다. 한 자리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는 꽃잎처럼, 태양과 노래를 싣고 땅 위로 떨어지는 맑은 물방울 같다.)


그 새소리는 침대 저쪽에 있는 분홍빛 아기 침대에서도 들려온다. 샬롯데가 백일하고 여섯 번째 아침을 맞아 눈을 뜬 것이다. 여인들이 향기로운 빵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농가 옆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거품 나는 크림 빛 우유를 무거운 아연 깡통 속에 붓고 있다. 다른 친구는 지금 막 교유기(攪乳器, 버터 제조기)에서 건져낸 버터를 두드려 댄다.


한 아이가 들판을 걸어오며 버터를 바른 빵과 호두 한줌을 입에 넣고 있다. 배가 고프다. 그렇다, 배고픔 그게 바로 나다. 이른 아침이면 마음의 갈증에다 뱃속의 쪼르륵 소리가 덧붙여온다. 왔다 갔다 거닐어 본다. 그러나 배고픔은 여전히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나는 공기와 침을 섞어서 삼켜본다. 두 손으로 양쪽 주머니를 뒤져보았으나 헛일이다. 며칠 동안 담배 한 모금 빨지 못했다. 맛있는 담배 한 대면 배고픔도 몰아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빵 배급이 나와야 담배도 얻을 수 있다. 지옥 같은 악순환이다. 보초가 맥없이 감시탑에서 내려다 본다. 하늘엔 종달새가 지저귀고, 하늘은 바람과 햇빛으로 가득찬다. 나의 서러움을 그 보초병에게, 새에게, 태양에게, 바람에게, 하늘에게 말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모두가 독일의 소유물이기 때문 이다. 


나를 둘러싼 것은 모두가 나에게는 적의에 차있기 때문이다. 막사에 돌아온 나는 침상에 개어놓은 담요에 몸을 던지며 이웃 친구에게 수치스런 이야기를 조그마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나는 배가 고파.”


아무 말 없이 그 친구는 내게 이탈리아 신문에서 오려낸 조각을 내밀었다. 그것은 최근에 받은 음식꾸러미를 채워 넣는데 도움이 되는 한 조각이었다.


“언제쯤 억류된 우리 이탈리아 장교들은 독일 동맹국이 만든 버터 바른 롤빵 배급에 진력이 나게 될까? ”

 

본능


29번 막사 앞에서 한 포로가 끌로 나무를 쪼개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독일군 장교가 그 현장에 도착하자 손짓 발짓 해가며 대화하기 시작한다. 그 포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는 무기를 내던지고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독일군 장교는 잠시 후 한 이탈리아 장교를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이탈리아 포로는 망치로 또 다른 나무를 쪼개려는 참이었다.


이제 모든 일이 명백해졌다. 둘이 힘을 합하면 두 사람 다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독일군 장교가 그들을 하나로 합치게 한 것은 무엇인가? 친절인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조직에 대한 독일인의 본능인 것이다. 


튜돈족(Teutons)이 전 세계를 하나로 조직하도록 주기적으로 고취하는 그들의 숙명적인 본능인 것이다.

 

난파선, 4월 20일 


노래 구절과 구절들, 기억에 떠오르는 사람들, 기관의 이름들, 포로끼리의 어색한 인사, 이 모든 것이 모래와 콜타르처럼 바닷물 위로 떠다닌다. 그 옆에 서서 우리는 거대한 난파선과 통나무처럼 마냥 잡고 늘어질 뿐이다.

 

러시아 형(形)의 포로들, 4월 22일


우리가 “볼가, 볼가스” 라고 불러주는 러시안 포로들이 하루 종일 지나가는 날이다. 큰 바퀴가 달린 마차에 똥통을 싣고 수용소 밖으로 나가서 푸른 보리밭이나 검은 토탄 한 가운데 파놓은 커다란 구덩이에 쏟아 붓고 온다. 마차는 이탈리아 군인 혹은 러시아 군인들이 5~6명씩 짝을 지어 밭 가는 황소처럼 마차를 끌고 간다.


러시아인들은 일 자체를 극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마치 그 통 속에 온 세상의 불행이 다 들어있다는 듯 우울한 모습으로 천천히 터벅거리며 걷는다.


러시아 군복은 군인보다는 죄수에게 더 어울린다. 길고 우중충한 담갈색 코트와 털모자 차림을 한 그 사람들의 얼굴은 이상하게 속을 헤아려 볼 길이 없다. 눈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고 입은 말이 없다. 그들은 어깨에 끈이 달린 밥그릇을 메고 다닌다. 그 모습에서 시베리아 형(形)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전쟁을 한다거나 전쟁에 이긴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연못, 4월 23일


수용소 한 귀퉁이엔 막사가 몇 개 흩어져 있고, 연못이라고 부를만한 물 웅덩이가 하나 있다. 주위엔 6피트 높이의 둑이 있고, 새까맣고 기름 덮인 물가에 잔디가 자라고 있다. 


4~5개의 막사와 2개의 전신주가 물 속에 비친다. 이것은 라게르 수용소 안에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매력 있는 오직 하나의 표본이다. 하늘은 전혀 연못에 비치지도 않는데 그것은 하늘이 자기 마음대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간색인 회색 빛 하늘은, 19세기의 에칭화법으로 그린 그림처럼 낭만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이 풍경을 꾸며주기 위해서만 존재한 듯이 보인다. 그래서 라게르 수용소의 주민들은 이보다 훨씬 따뜻한 기후를 찾으려는 계획을 미루어 둘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람들은 병아리 떼 모양 연못 주위로 서로 다투어 기어오른다. 그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쌀과 콩 요리에 불지필 석탄덩이를 찾아내고, 그런 다음날 밤엔 대부분 모두 토하고 만다. 


그 풍경은 마치 서구 유럽 큰 산업도시의 근교에서 볼 수 있는 분위기이다. 빈 깡통을 주워 모아 만든 초라한 오두막집에는 나프타나 타아르나 때로는 우울한 냄새까지 풍겨 나온다.


각기 다른 연배의 장교들은 그들의 모습이 비치는 더러운 못가에서 쓰레기를 뒤지고, 독일군 사병들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그 옆을 재빨리 지나쳐 가버린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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