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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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밀일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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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 유니스 윤경남 옮김

 

 

 

 

 

(지난 호에 이어)
 “죠반니노씨, 어서    오십시오!” 울타리 숲과 나무와 잔디가 덮인 도랑물이 인사했다.


내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이 모든 것들은, 착하고 옛날식 그대로의 시골 풍경들이다. 그들은 내가 지나가면 내게 말을 걸며 떠나지 말라고 설득하기도 했지. 내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하지만 걱정스러운 마음 때문에 참는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들은 나를 알았다. 


그 때 그들은 내게 제비 꽃과 검은 딸기와 둥글고 납작한 돌멩이를 내게 선물했었지. 어느 날 느릅나무는 내게 참새새끼 한 마리를 주었고, 도랑물은 내게 유리알 같은 잠자리를 잡아주었지. 그러나 지금 나는 장성하여 턱수염도 났다. 


그들은 이제 내 입 속에 들어가면 호루라기가 될 오얏 잎이나 아카시아 잎새를 주겠다는 말을 차마 못한다. 나는 오로지 고마울 뿐이란 표시로 풀잎 하나를 뜯어 업에 물고 풀피리를 불면서 나는 계속 걸어간다.


다음 모퉁이만 돌면 내 집이 갑자기 나타나리라. 온 식구가 내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놀란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리라. 바로 그 모퉁이 길엔 마돈나를 모신 신전이 보이고 그 앞에 긴 의자가 놓여있다.    


멀리서 누군가 소리쳐 부른다. 


“죠반니노!”


“쥬세삐나 할머니! 할머니는 왜 평화롭고 푸근한 잔디가 덮인 할머님 무덤을 떠나 이렇게 멀리까지 오셨나요? 내가 쓸쓸하고 먼 길을 걸어오면서 꺾어 온 꽃들을 안고 할머니께 갔을 텐데요. 할머니, 제가 그 꽃을 이 지갑 속에 잘 넣어두었다가 할머니께 가지고 가서 내 얘기를 모두 들려드렸을 텐데요.” 


“나도 안다, 죠반니노. 그래도 난 참고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널 만나러 나왔단다. ”    


“그렇게 오래 기다리셨나요? 쥬세삐나 할머니?”


“네가 떠난 다음 날부터 줄곧 기다려왔지. 여러 달 동안이나 나는 이 친절한 마돈나와 네 이야기를 주고 받았단다. 마돈나도 나만큼이나 네 어린 시절 일들을 알고 있잖니? 매일같이 책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이 앞을 지나다니던 너를 말이다. 그 꽃은 마돈나에게 드려라. 내 무덤엔 가지가지 꽃들이 자라고 있단다. 빨간 양귀비도 있는데 네가 오면 주련다.”


“갈게요, 할머니.”


나는 마돈나 상 앞에 있는 제단 위에 세워놓은 상자 속에다 내 꽃들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화판이 다시 열리고 방금 꺾은 듯 꽃잎이 선명해진다.


“잘가라, 죠반니노, 냉수 너무 마시지 말고. 모자도 다시 잘 쓰는 게 좋겠다.”    


할머니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절뚝거리며 들판을 지나 오던 길로 되돌아 간다. 이제 나의 집이 보인다.


“죠반니노, 뛰지 말아.” 할머니가 뒤돌아 보며 소리쳤다. 


“힘주기엔 너무 약해졌잖니?”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뭐라 소리지를 것 같은데,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내 목소리는 아마 스칼라 극장의 합창소리처럼 울릴 터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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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죠반니노는 마침내 집에 왔다. 바로 이때 그는 곤경에 빠진다. 마지막 장면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단지 감상적인 환상 속에 몇 달씩 고생하다가 이제 와서 실수로 막을 내려버린다면, 그건 완전히 시간낭비가 아닐 수 없지. 이 문제를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큰 소리로 떠들어 볼까 했던 첫 번째 생각은 아예 치워버렸다. 큰소리로 떠들면 오랫동안 시달린 악몽에서 조용히 깨어나야 할 착한 식구들에게 무례한 충격이 될 것이다. 


죠반니노는 목표 지점인 아내 침실의 창문 밑으로 다가가 꿈결같은 목소리로 아내의 이름을 부른다. 잠시 후, 덧문이 열리고 잠이 덜 깬 얼굴이 내다본다. 아내였다. 몹시 놀란 한 순간이 지나가자 아내의 반쯤 감긴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아내의 머리가 안으로 사라진 후, 큰 비명 소리가 들린다.


“그이가 왔어요!”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마치 프랑스 혁명을 연상케 했다. 첫 번째 비명에 두 번째 비명이 응답하고, 두 번째 비명에 세 번째 비명이 응답했는데, 점점 더 소리가 멀어지고 있다. 그러다가 가까운 데서 다시 들려오더니 공포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자물쇠가 삐걱거리고 쇠사슬이 덜커덩거리며 문에선 꽝꽝 소리가 난다. 둔하게 털썩 주저앉는 소리, 고양이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 달그락거리는 발자국소리, 귀를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알베르띠노는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리려다가 발이 잠옷에 걸린 채 계단을 구른다. 엄마! 하고 소리지르는 애를 잡으려다가 아내는 공을 밟고 미끄러져 금붕어 항아리가 놓인 식탁모서리를 잘못 잡아 물을 뒤집어쓰고 마루바닥에 넘어진다. 물고기들이 미친 듯이 꼬리를 팔딱거리다가 아내의 잠옷 속으로 튀어 들어간다.


고양이는 이때다 하고 팔딱거리는 붕어를 덮친다. 죠반니노는 아내의 얼굴은 못보고 그녀의 산발한 뒤통수와 물고기와 고양이 울음만이 그를 맞게 된다. 


한편, 그의 늙으신 아버지는 안경을 찾아 쓸 새가 없이 문간을 향해 더듬다가, 찬장 손잡이를 비틀어 열고 도자기 찬장 속으로 비틀거리며 뛰어들었다. 도자기가 깨져나가는 소리에 죠반니노의 어머니가 잠을 깼다. 어머니는 지진이 난 줄 알고, 자기는 걱정 말고 아이들부터 먼저 돌보라고 소리지른다.


모두들 잊고 있었던 아기가 침대에서 땅바닥으로 기어 나온다. 아기가 초인종을 계속 누르는 바람에 중앙유럽의 모든 급행열차들이 한꺼번에 정거장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안돼, 안돼. 이래선 안 되는 건데!” 죠반니노는 흐느끼면서 법석이는 그의 가족들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다. 모든 게 다 끝나버렸다. 그는 영화필름을 끝에서 처음 부분으로 다시 감아주듯이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기는 자기 위치를 다시 찾아 침대로 돌아간다. 늙으신 아버지는 도자기 찬장에서 다시 나오고, 도자기 조각들은 접시로 컵으로 컵 받침으로 다시 되돌아가 선반에 얹힌다.

식탁다리는 다시 펴지고 금붕어들이 어항으로 다시 들어가고 아내는 자세 반듯하게 위신을 다시 세운다. 알베르띠노는 위층으로 구르듯이 올라가고 창문은 닫힌다.


죠반니노가 내뱉은 말들이 다시 하나씩 입으로 들어가고, 그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며 풀밭에 쓰러진다.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꿈 속에라도 집에 돌아온다는 일은 무척이나 힘든일이군요.”

 

쥐어짜기, 4월16일


나는 울타리 이편에서 저편으로 왔다 갔다 해본다. 빨리 움직이면 배가 점점 더 고파진다. 모래 위에 찍힌 표적은 사람의 발자국이거나 생각이 남긴 흔적이다. 내 발자국과 생각도 다른 사람들의 것과 겹쳐있다.


나는 옆에 있는 울타리를 넘어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날아간다. 나의 간절한 욕망이 낯익은 땅에 닿을 때까지. 내 고향마을의 중앙 광장은 황금빛 해가 눈부시고, 카페의 식탁마다 양산이 펼쳐져 있다. 내 친구들이 그곳에 둘러앉아 지나가는 예쁜 아가씨들을 쳐다보고 있다. 훈훈한 밤 공기, 지난날의 즐거운 추억이 내 눈과 마주치는 얼굴과 벽 사이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허기진 배가 여러 가지 생각과 맞서자 나를 광장에서 옆길로 몰아내고 있다.


“빵을 다오!” 허기진 배가 소리친다. “너는 오븐에서 방금    구워내어 손가락 사이로 바삭바삭 소리 나는 싱싱하고 향기로운 하얀 빵을 먹고 싶어하고 있다고.”


나는    전에 보지 못하던 빵집들을 많이 찾아낸다.


“빵을 다오, 빵을!” 무거운 밤나무 식탁 위에 부착된 빵 자르는 기계가 아래 위로 움직이며 빵을 자른다. 배달하는 아이가 그 빵들을 어깨에 둘러메고 나른다.


이쪽 울타리에서 저쪽 울타리로 천천히 걷고 있을 때 내 두 발은 푹푹 빠지는 모래 대신 바삭바삭 소리 나는 빵 덩어리를 밟는다. 배고픔은 슬며시 내 위장을 주무르고, 솥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는 내 눈을 흐리게 한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기억의 샛길로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다. 배가 고프다고 소리 지르고 싶다. 그러나 그런 내 목소리가 들리게 될까 두려워 나는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배고픔은 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다. 


빵과 우유와 치즈. 배고픔은 단순한 음식 맛을 찾게 한다. 순수하고 영원한 충동을 만들어 낸다. 배고픔과 서러움은 영혼과 입천장을 깨끗하게 해주고, 인간이 삶의 원천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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