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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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밀일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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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 윤 / 윤경남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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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우리 포로들은 짐을 모두 빼앗긴 다음 짐차에 실려 벌레가 우글거리는 라게르(Lager) 수용소에 짐짝처럼 몸을 던졌다. 우리 주위에 있는 공동묘지 속에는 우리 선임자들의 시체가 가득 묻혀 있었다.


곧 외부세계는 잊혀졌고, 국제 적십자사는 그들의 헌장에 따라 “군사적으로 억류된 자들”인 우리 신분에 맞는 규정이 따로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서로 대적 관계의 두 군사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똑같이 조국에 해를 끼치고 있었다. 


그들 중 그라지아니(Graziani) 는 우리를 위해 목청을 높여 한마디 해 줄만 하건만 널리 알려진 우리의 적이었으며, 바도글리오(Badoglio)는 아예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모두 정치하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라 용기를 주는 격려의 한마디였다. 그러나 우리는 업신여기는 소리나 들었고 아니면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 당시 이탈리안의 창의력을 발휘한 라디오를 만들어 냈다. 그 라디오에서는 여러 나라 말로 방송되는 수천 개의 낱말이 흘러나왔지만, 우리 말을 하는 방송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남부에선 정치에 눈먼 자들이 아첨을 떨고 있었고, 북부엔 정치에 현혹된 풋내기들이 서로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가끔 우리 조국에서 온 몇 사람의 대표들이 철조망 밖에 와서 몇 마디 던지 고 가곤 했다. 그것은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었다. 즉 우리가 의무를 다하고 명예를 얻는 길은, 자발적인 옥중생활이 아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고향에는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지하에서 혹은 연합군 수용소에서 우리가 가 그들을 총살하도록 기다리는 곳이었다. 우리는 점점 더 비참하게 소외 당했지만 짐승같이 굴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문명을 일으켜 세웠다. 뉴스방송, 강연, 예배, 대학강좌, 연극, 음악회, 전시회, 운 동 시합, 공예, 도서관, 지방의회, 라디오 청취센터, 상품거래소, 구직광고 그리고 제조와 무역을 취급하는 기업체 등을 조직해갔다.


이미 말했듯이 지위나 명성은 좋건 나쁘건 바깥 세계에 버려둔 채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갑작스레 벌거숭이가 된 셈이다. 남은 것은 내면의 재질뿐이라서 이에 따라 타고난 대로 주고 받을 뿐이었다.


이 새로운 세계에선 사람들이 자신의 내적 가치에 따라서 평가 받는 단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라게르 수용소 생활은 언제 어느 곳이나 똑같았다. 길게 펼쳐있는 모래사장, 똑같이 생긴 수용소 간이 막사들, 언제나 느끼는 황폐함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거기엔 문명인들이 사는데 필요한 것이 다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는 히트송도 있었고 아주 세련된 그 노래의 가사와 음악은 우리의 감정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짐승처럼 살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우리는 민주도시를 세웠다. 만일 과거에 포로였던 그들이 지금의 일상생활에 충격을 받거나 세상을 멀리하고 있다면, 그들이 갇혀있을 때 마음 속에 품었던 민주주의와 현실의 민주주의의 이미지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의 민주주의는 음모가 횡행하고 있으며, 과거의 해적들과 새로운 해적들이 옛 해적선의 키를 잡고 있음으로써 이에 실망하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가장 정직했던 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사람들에게도 나는 이 글을 써 보낸다. 6865 번의 음성은, 자전거 핸들 같은 콧수염 밑으로 지금도 똑같은 소리를 내어 말하고 있다. 덧붙일 것도 없는 말을. 


나는 원래의 내 일기장은 내다버렸다. 왜냐하면 라게르에 있던 내 동료들이 찬성하는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 수용소 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다름없는 민주주의 신봉자다. 내 얼굴을 오르내리던 벼룩도 이도 빈대도 쥐도 지금은 없다. 게걸스레 먹으려던 허기 대신에 미지근한 식욕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내 주머니 속엔 내가 좋아하는 온갖 담배가 다 들어있다. 그래도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민주주의 신봉자다. 내 동지들이 안정하지 않는 이야기는 인쇄되지 않도록 하련다. 내 동지란 현존하는 사람만이 아니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죽은 사람을 무시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처참한 모험을 해보지 못한 독자들에겐 이 글이 어떤 영향을 줄는지 모르겠다. 아마 지루해 할 것이다. 나도 그 당시엔 지루함을 느꼈으니까. 적어도 감옥생활을 익살스럽게 그린 책이 나온다는 건 그들에게 큰 즐거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아무튼 나는 스물세 명의 충실한 내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을 준비 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음에 내가 다시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더 잘 써 보도록 노력하겠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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