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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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비사> 제26회-계관시인 윤치호의 영문일기18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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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환구단의 위치는 오늘날 조선호텔이 서있는 자리와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면서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을 헐어버리고 철도호텔을 세웠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천황과 관련된 유적들을 오늘날까지 잘 보존한 것을 보면 환구단을 헐어버린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현재 조선호텔 옆에는 팔각형의 황궁우(皇穹宇)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는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주들을 보관했던 곳이다. 본 건물은 사라지고 부속 건물만 남은 셈이다.


 고종은 환구단에서 천지의 신에게 대한제국의 탄생을 알리는 제사를 지낸 다음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 때 제단에는 황제용 황금 의자가 놓였고, 고종은 의자에 앉아 아홉 가지 문양이 수놓인 구장복(九章服) 위에다 열두 가지 문양이 수놓인 십이장복(十二章服)을 입었다. 구장복은 국왕용, 십이장복은 황제용 예복이었다. 『고종대례의궤』를 보면 고종이 십이장복을 입는 순간에 칭호가 폐하에서 황제로 바뀌는데, 바로 그 순간 고종이 황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던 날, 고종은 황제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행렬의 앞에 세워 새로 탄생하는 대한제국을 형상화했다. 이에 화답하여 서울의 시민들은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표현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태극기는 대한제국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대한의 국기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건설한 것은 일본과 서양 제국의 압박으로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부흥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고종의 황제 즉위식에는 대한제국의 독립성과 황제의 권위를 부각시키는 의례와 상징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고종대례의궤』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있다.     


정동의 경운궁은 황제의 궁궐로만이 아니라 자주독립국을 표명한 대한제국의 중심부로 재탄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라 정한 다음,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1897).


10월 13일. 수요일. 화창한 날씨


 미리 약속한 대로 리이드 박사와 콜리에르와 함께  서울을 떠나 송도를 향해 가다. 서울과 파주 사이 80리 길을 지나서 10리를 더 가면 문산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90리를 말 안장 위에 올라 앉아 간다는 것은 아주 고역이다.  특별히 이 여행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문산포에서 새로 지은 예배당 안에 따뜻한 방을 찾아 들어갔다. 저녁을 먹고, 문산포 교인들과함께 예배를 드리다. 교인이 모두 30명 가량 된다.


10월. 14일. 목요일. 맑은 날씨


 새벽 1시에 일어나다. 뜨거운 커피 한 잔과 멋진 도자기 대접에 오트밀 한 그릇을 대접 받고, 기운내어 새벽 4시에 다시 길을 떠나다. 송도에 오전 10시에 닿았다.


 리이드 박사가 여장을 푼 후에 이모부와 남감리교회 재산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고, 간식을 들며 휴식을 취하다. 저녁 식사 후에 간담을 나눌 때 이모부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송도에 있는 인삼 업자들은 왜놈들 가운데서도 아주 염병할 못된 놈을 만났다네. 왜놈들은 인삼을 살 때 제 값을 치르는 법이 없다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 법에 왜놈이건 외국인이건 인삼을 도매로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인삼밭 사업과 관련이 있는 악질 상인을 수중에 넣어 맘대로 쥐고 흔든다네. 그들 간에 모종의 계략이 성립되면, 일본인이 조선사람에게 인삼 밭을 저당 잡았다고 주장하는 걸세. 그 조선사람은 당연히 빚을 갚을 길이 없어지고, 일본인은 그때 잽싸게 인삼밭에 가서 인삼을 파간다네. 여러 사람이 이런 식으로 인삼을 도둑 맞아도, 조전 정부가 썩어 문드러져 있기때문에 인삼농사 업자들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다네.


 “3년 전에 내가 송도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나는 무명인사였지. 그런데 지금은 이 고장에서 제일 유력한 인사가 되어있다고 할 수 있네. 내가 그럴 목적으로만 파고 드는 건 아니네만,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도움이 되든 상처를 주든 그 사람들과 좋은 말로 트고 지내야만 한다네. 지난 해에 서울에 갔을 때, 내가 엄비를 방문하게 되었네. 엄비가 산 귀신 강물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행사에 필요한 자금을 쾌히 드리고 싶다고 말했네. 그러자 송도에 살고 있거나 방문하는 특수 계급의 일본인들이 나하고 친근하게 말하며 가까와지고 싶어한다네.


 송도 시장은 뛰어나게 능력이 있고 성실한 사람으로 나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지. 내가 지난 봄에 서울에 갔을 때, 대원군이 내게 글을 써보내어 1,500불을 빌려달라는 걸세. 그렇게 해주었지. 그러자, 송도에 오는 관리들이 모두들 중대한 사업차 만나야겠다고 나를 찾아 온다네. 어려운 일이 생긴 상인들도 내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지. 내 인생에 이런 저런 계획들을 실천해나가려면 여간 큰 돈이 드는 게 아닐쎄. 하지만, 그 일들을 안할 수도 없다네. 그렇지않으면 파멸하게 될 것만 같은 공포심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네. 내가 어떤 고객의 친구가 되는 건 상관 없지만, 내 이름이 대궐 안에 너무 널리 알려지는 일은 두렵단 말일세. 이 비참한 나라 구석에서 내 이름이 더 이상 알려지지 말았으면 좋겠네.

 

 


 “그런데, 내가 자네에게 충고하는데, 스페이어씨의 제안을 받아드리고 그에게 바짝 붙어 지내게. 자네의 개인적인 안전이 그 사람 손에 달려있다네. 사태가 달라지면, 그때 자네도 자세를 다시 바꾸면 된단 말일세.”


 이모부 이건혁씨는 현명하고 훌륭한 인물이다. 이모부는 점잖고, 친절한 마음씨와 기사도에 알맞는 용기를 지닌 분이다. 그가 개인적으로 만날 때 끌어당기는 힘은 대단하고, 그의 통속적인 인기 또한 굉장하다. 그는 자신의 편의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잘못일 뿐이다.


10월 16일. 토요일. 화창한 날씨


 어제 밤에 파주에서 지내다. 새벽 1시에 일어나다. 10시에 서울에 닿다. 집안이 모두 무고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14일에, 황제께서는 조선의 명칭을 대한으로 바꾼다는 칙령을 내리다. 폐하께서는 백성들에게 여러가지 좋은 사업 계획들을 언약하신다. 나는 새로 약속하신 그 말씀들을 한 마디도 믿지 못하겠다.


10월 25일. 월요일.


 전에 박영효의 비서관이었던 안기정이 오늘 오후에 나를 찾아오다. 그는 방금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그가 말하기를,


 “윤 공은 잘 기억해 두십시오. 스페이어가 공사로 부임하기 직전에 잠간동안이나마 불편하고 불안한 시기가 올꺼요. 그 사람의 견해를 알 수는 없지만, 일본이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일에 효과적으로 박차를 더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나라 안에서는 아무도 눈치를 채고 있지 못하지만, 폐하께서는 불편하신 듯했소. 나를 박영효에게 보내셔서 국가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 그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알아보라고 하셨소.


 둘째로, 박영효를 설득하여 대한제국으로 다시 망명하도록 유도하라는 지시입니다.


 셋째로, 그자들이 도쿄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탐하라는 지시가 내렸소. 그래서 나는 사흘 밤과 낮을 박영효를 지켜보았소. 박영효는 귀국하는 일을 매우 두려워하면서, 홍종우의 편을 들지않으려 했소. 박은 자기듸 ‘서예 글씨’들을 팔거나 한문 글씨 작품들을 매매하려고 합디다. 그는 내게 자기가 개인적으로 폐하께 올릴 말씀이 많다고 하는군요.


 “이제 내가 익숙하지도 않은 직책때문에 도쿄에 가지않고 대한제국으로 귀환했소.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도 알게 되었소.”


 “만사가 조용하게 지나갈 겁니다. 황제께서 더 이상 박영효를 찾진 않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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