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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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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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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술(譯述) 윤경남(국제펜클럽회원)
윤치호 영문일기 제4권 1895년~1896년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역술(譯述) 윤경남>연재를 시작하면서:
윤경남(국제펜클럽 회원)


  지난 가을에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譯述 윤경남>출간기념회에 참석해 주시어 좌옹 윤치호 선생님을 새롭게 조명  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윤치호 영문일기 11권가운데   제4권(1895~1896) 에서 1896년 일기만  올렸으나,  정사에 오르지 않은 비사가 담긴 윤치호 일기의 의미를 깊이 헤아리는 이용우 사장님의 요청과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입어 공개된 적이 없는 1895년 일기부터 새로  연재하게 되어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듯 감개무량합니다.  

 


  윤치호 영문 일기 제4권은, 갑오개혁으로 사면을 받은 윤치호가 1895년에 10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선교와 정치개혁의 꿈을 안고 귀국한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1895년에 명성황후(당시 민비)가 시해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과 친일세력들에게 감금당한 임금을 구해내려다가 실패하는 춘생문 사건은, 조선 임금이 그의 거처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 의 험로를 겪게 만듭니다. 


그 돌파구의 하나로, 마침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 축하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학부협판이던 윤치호는 민영환의 수행원으로 함께 참석합니다. 계속되는 드라마틱한 역사성과  윤치호 일기의 수려한 문학적 표현 때문에,  제4권 일기는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라는 제목을 붙였읍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절단 활동 중 민영환과 윤치호 사이에 왜 갈등이 생겼으며, 윤치호가 왜 사절단에서 따돌림을 당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하지요.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 장군은  춘생문 사건이 실패하자, 윤웅렬은 상해 리드 선교사의 집으로, 윤치호는 언더우드의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아관파천 이후에 풀려납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 중임에도 신변의 위험을 감당할수 없었고, 가장 믿을 수 있는 그의 사촌 동생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사로 보내서 임금의 신변 보호와 차관 교섭을 하도록 선임합니다.


  민영환은 외국어를 모르고 해외여행 경험도 없습니다. 한편 윤치호는 외국어에 능통하고 외부협판으로서 세계정세에 밝아 사절단 대표로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갈등의 시작은 사절단이 출발한 다음부터입니다. 본국에서 훈령이 오기를, 러시아 정부와 비밀 협상을 할 때는 윤치호를 빼고 우리 말을 잘모르는 젊은 통역관 김도일을 데리고 하라는 것입니다. 김도일은 우리글과 말을 잘 몰라서 황태후를 ‘황제 에미’ 라고 통역할 정도입니다. 윤치호는 이 사절단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회의를 느끼면서도 임금님의 부탁이 있었기에 민영환을 보필하기로 다짐합니다.


   첫 번째 갈등은 대관식에서 벌어집니다. 대관식에 모든 축하 사절들은 모자를 벗고 들어가는 것이 국제관례라는 윤치호의 설명을 듣고, 민영환은 조선의 양반에게 갓을 벗으란다고  대노하면서 끝내 입장을 거부하지요. 동서양 문화와 가치관의 충돌이 시작된 겁니다.


   두 번째 갈등은 민영환의 명함을 특명전권 공사가 아닌 특사로 만든것 때문입니다.    대관식 기간 중에는 어느 나라 대표를 막론하고 모두 특사로 대우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나라 사절들(특히 일본 대표)이 경계하지 않도록 특사 명함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민영환은 수긍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갈등은 윤치호가 통역을 할 때 민영환이 말한 것을 그대로 직역하지 않고 짧게 줄이거나 잘못 통역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윤치호로서는 민영환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알아듣기 쉽게 영어로  말했다고 그의 일기에 기록합니다. 니콜라이 황제가 윤치호와 영어로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을 질시하며 기분이 상한 듯합니다.


  결정적인 갈등은, 본국에서 수시로 윤치호를 격리시키라는 훈령이 내려오는 데 있습니다. 임금님이 명례궁으로 환궁하시도록 결정한 계획을 일급비밀로 하라는 것입니다. 윤치호가 출발하기 전에 임금과 여러 대신들에게도 간곡하게 건의했던 일인데도 윤치호를 따돌리고 비밀로 하라니 가소로운 일이지요. 민영환은 청렴 강직한 성품이지만 융통성이 없고 외국어를 못하는 자괴감과, 그가 맡은 임무가 워낙 막중하므로 늘 강박관념에 짓눌려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지냅니다.


  대관식이 끝나고 윤치호는 망국지한과 객지의 고독감을 느끼며 사절단원과 결별하고 프랑스로 떠납니다. 윤치호를 그렇게도 괴롭히던 민영환은 파리로 떠나는 윤치호를 따뜻하게 전별하고, 귀국 후에는 둘도 없는 동지가 됩니다.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에서 생긴 일들은, 나라를 가슴 속 깊이 사랑하는 마음은 똑 같으나 정치관과 인생관이 서로 다른 평행노선을 걸어간 근대사의 두 인물의 비화를 보여줍니다.  


이 책을 내는 데 큰 힘을 주신 분은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태진 박사님이십니다. 국편에서  1971년~1989년에 편찬 간행한 『 윤치호영문일기』11권을 우리말로 번역해달라는 저의 제안을 받아주셨고,  필자가 단독으로 번역한 제4권을 위해“번역 출간에 부치는 글”도 써주셨습니다. 또 하나의 큰 목표인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 임을 공인하는 일도 머지않아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 *1907년에 윤치호 선생이 자신의 서술-‘애국가’ 와  번역이 든『 찬미가』를 尹致昊 譯述이라고 했기에, 이번에 출간 된 책도 필자의 서술과 번역이므로 ‘윤경남 역술’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譯述은 번역(飜譯)과 서술(敍述)을 의미함.)
 
 
선교의꿈을 키운 에모리대학  


  

<Eventful Life of Yun, Chi-Ho> The EMORY MAGAZINE 1976년 기사(1996년 필자와 함께 에모리대학을 방문한 좌옹의 외손자, 정태진 박사 사진제공)

 


1895년 1월 1일. 화요일. 상해 중서학원.


 새해를 여는 멋진 날이 시작된다. 아침 10시, 교사들이 모두 사무실에 모여 새해 인사를 주고 받았다. 남학생들은 거의 다 참석했다. 알렌 박사와 로호르 선생이 제공한 땅콩과 과자와 케익을 소년들에게 나누어주다.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두 곡 부르다.


새해의 첫 번째 편지를 어여쁜 내 사랑, 시엔숭에게 써 보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므로.
오전에 두시간 동안 내 책들을 트렁크에 집어넣는 일을 했다.


오늘 아침에, 중국 본토에서 온 조선생이 내게 중국말로, “오래 살고 아들 낳으시기 바랍니다.”고, 말한다. 장생과자나 교자에 부친 행운놀이의 글자들이 행운을 비는 모습을 암시하는 듯, 소년들의 명랑한 웃음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뿐 아니라 중국인들은 누군가 아들을 낳으면 붉은 계란을 친구들에게 돌리는 풍습이 있다.


 중서학원의 옛날 동창 친구 정문광 에게서 편지와 사진 한 장을 받다. 그는 Ichang 세관 사무실에서 일한다.

그 사람은 내가 십 년전에 상해에 도착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기억해둘만한 인물이다. 헨리 정문광의 형은 그 당시 미국영사관의 통역관이었다. 헨리는 나의 대학생활 중 3년 반 동안 우리 학교(역자주: 밴더빌트대) 동급생이었다. 그의 동생인 정문고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학교에 남아있었다. 동흥양행의 미야게씨를 방문했으나 못 만나다. 일본 사람 여럿이서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즐겁게 담소하고 있다. 오늘날 즐거워할 명분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일본 사람들 뿐일터이다.

 

1월2일.수요일. 아름다운 날씨. 저녁엔 추운날씨. 상해 중서학원.


오늘 아침에 알렌 박사가 말하기를, “ 자네가 중서학원   교무처에 사직원을 제출한것은 잘못한 일일세. 학교가 자네를 위해 해줄 일이 아무것도 없다네. 교무처가 자네를 위해 세운 계획도 내가 만든 거란 말일세. 본넬 선생은 자네의 사직원서를 수리하지 못하도록 라켓을 던지며 소란을 피웠다네. 자네가 본넬선생에게 직접 말하게나. 사직원서를 교무처에 제출한것은 절차상 잘못된 일이었다고.”알렌 박사의 음성은 그의 기분이 아주 언짢은 듯이 들린다. 그의 감정이 그 일에 대해 극도로 격분 해 있음을 알 수있다.


내가 사직원을 교무처에 냈거나 학장에게 직접 냈거나 내겐 그게 그거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본넬 교수가 어떻게 이런 학장 밑에서 견뎌 왔는가 였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난킨 가의 한 가게에서 옛날 우표를 구경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가게안에서 40센트 짜리 조선 우표를 2장 보았다. 오늘 오후에,애퐁의 여동생이 내게 말하기를 상해기념 우표위에 쓴 중국풍의 우표는 애퐁이 쓴 것이라고 자랑한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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