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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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비사(제4회) - 계관시인 윤치호의 영문일기1897년~19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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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금요일. 아름다운 날씨.

 

좋은 날씨가 온 종일 이어지다.


 아침 8시에 로호르 선생에게 찾아가다. 도라 랭킨의 생일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도라 랭킨은 이곳에 있는 친구들과 더불어 생일 잔치를 하려고 남경에서부터 날아왔다. 아내는 외출하고 없다. 우선 얼리 선생에게서 귀가 따갑게 들어서 알고 있는 콜리양 부터 만나보았다. 이 젊은 여자 선교사는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리는 성실한 종의 모습을 갖춘 기품 있는 숙녀였다. 


 생일 만찬은 9시 30부터 10시 사이에 끝나 모두 뿔뿔이 헤어지다.

 

1월 23일. 토요일 변덕스런 날씨.


귀국하는 항해여행에 필요한 몇 가지를 준비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다.


헤이굿 선생을 오전 10시에 방문하다.  나의 본래  사명은 선교사역이며 그외의  것은 부수적인 일일뿐이라고 헤이굿 선생에게 말해주었다.


 맥타이르 홈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점심식사를 함께 하다. 코페이와 랭킨 선생등이 함께 했다.


   오후 1시 경에 맥타이르 홈을 나서다. 사랑하는 아내와 또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 마음 아프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우리가 다시 함께 살  집을 빨리 갖게 허락해 주소서.


   1시 30분에 센다이 마루에 오르다. 콜리어씨와 한때 서울 주재 청국 영사였던 동씨와 이학균 등이 같은 배에 탔다. 이학균은 나의 선실 동료가 되다. 1시 45분에 닻이 오르다. 로호르씨가 우리를  전송 해주다.

 

1월 25일. 월요일. 춥고 맑은 날씨.


썩 괜찮다 싶은 항해를 마치고 오후 3시 쯤 제후(烟台)에 닿았다. 제후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같다. 그나마 눈에 띄는 사람들이란 남부 보다 더 가난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하인 두 명이 지고 온 가마가 아주 훌륭해 보였다.


   이학균이 내게 말하기를, 전하께서 샹하이에 피난처로 삼을만한 집 한 채를 사놓으셨었다고 한다. 임금님 답지 않고 더구나 왕비전하 답지도 않은 발상이시다! 백성을 사랑하는 굳건한 왕좌를 구축해놓는 대신에, 오직 그들 자신이 초래한 모든 위기를 모면할 장소로 피난처를 준비하는 데다 돈을 끌어모은 것이다. 그렇게 똑똑하던 왕비로서 저렇게도 이기심에 찬 행동을 하셨다니, 연민을 금할 길이 없구나!


 제후에서는 가무하는 소녀들이 쿨리의 등에 업혀 돌아다니며 유치한 솜씨로 노래하고 춤을 춘다.

 

1월 27일. 수요일. 맑고 추운 날씨.


 12시 30분에 제물포에 도착하다. 오후 3시 반 쯤에 해안에 닿다. 세관에 먼저 가다. 그런 다음 손상집의 집으로 가다. 그는 내가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다. 그는 유별나게 친절한데 원래 태생이 그런 모양이다. 리이드 박사님이 콜리에씨를 만나러 찾아 오셨다. 박사님이 건강해 보이셔서 기쁘다.

 

1월 28일. 목요일. 맑고 추운 날씨.


아침 8시에 가마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다.  가장 실망스런 마음을 일으킨 이  나라의 진흙 투성이 도로에 발목까지 빠지며 냅다 미끄러지기가 일수인 길이었다. 고생스럽고 매운 추위 속에 여행이 끝나고, 6시 경에 서울에 닿았다. 리이드 박사님 댁으로 직행하다. 말을 타고 오신 리이드 박사님과 콜리어씨는 나보다 두 시간 전에 도착하셨다. 리이드 부인은 언제나처럼 상냥하시다. 성품마저 참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참으로 헌신적이시다. 그 모습이 사랑하는 내 아내를 엄청 생각나게 한다. 


10년 전 어느날 아내와 함께 있을 때 일이 강렬하게 떠오른다. 소주에 있는 우리집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였다. 리이드 박사님은 그 당시 신문에 난 조선의 문제들에 대해 신랄하게 계속 지적했다. 그의 논평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 신랄한 태도가 내 뇌리에 콱 찍혀버린 것이다. 그 당시에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리이드 박사님이 조선 남감리교회의 초대 선교사로 파송되리라고 한다. 그런 일은 이 세상이 끝나는 날에나 일어날 거라고 나는 판단해버렸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우리들의 좁아터진 가슴 속에 굉장히 신비스런 방법으로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도록 그를 움직이게 하신 분이 계셨음을. 바로 그 리이드 박사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 것.   이 조선 땅의 첫번 남감리교회 대표 선교사로 오셔서 이 자리에 우뚝 서 계신 것이다.


리이드 박사님은 틀림없이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남녀 불문하고,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그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만큼, 그리고 선교사업에 동기를 제공하고 좋은 결과를 초래한 성공적인 훌륭한 분이신 게 틀림없다.


저녁 식사 후에 우리 옛날 집에 가다. 삼촌과 사촌들이 모두 잘 지내는 것을 보고 기뻤다.

 

1897.1월 30일. 토요일. 맑은 날씨.


내 한복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외출할 수가 없게 되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방문하다. 아펜젤러는 내게, 웨베르 공사 내외가 내가 상트 페테르부르그에 있을 때 그들의 관심사를 방해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저녁 9시에 웨베르 공사 부부를 예방하다. 참을 성이 없는 웨베르 부인은, 내가 상페테르부르그에 있을 때 사절단과 관련되었던 일들을 “알아 내려고” 에둘러 말한다. 나는 자초지종을 숨김없이 웨베르 공사 내외에게  소명(疏明)했다. 내가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있는 동안 겪었던 불쾌한 상황을 겪었음에도 민공은 내게 불친절하게 대했다고 밝혔다. 나는 그가 아주 공정한 처리를 하는 전권 공사임을 전제하고, 존중해 주면서 말했다.  


 그리고, 민공이 ‘공공연하게’ 냉정한 태도로 나를 설득하려고 한 것은, 그가 ‘서울 조정’에서  모종의 훈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웨베르 부부는 ‘조정’에서는 아무도 민공과 나 사이에 불화를 만들어  내도록 지시한 사람이 없었노라고 잡아뗀다.


그래서 나도  사절단에 거역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얼마나 근거없는 소문이 돌아다니는가, 실제로 내가 러시아에 머물고 있는 동안 내내 웨베르 부부를 칭송했을 망정, 웨베르에 관하여는 한 마디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더 확실하게 말 해서, 내가 스타인 에게 조차도 그런 주제로 입에 올리는 일을 얼마나 조심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스타인이 웨베르와 특별히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오늘 저녁에도 나는 웨베르가 스타인에게 소소한 일에 조차 관심을 보이고 있음으로 말조심을 하고 있는 터였다.


“당신과 스타인씨는 가까운 사이였지요, 안 그래요?” 하고, 웨베르가 묻는다. 이 말에 대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러나 완곡하게, “그럼요.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사이 였지요.”라고, 대답해주었다. 


웨베르 부부는 내 설명을 듣고 나자-내가 파리에 가게된 이유들-불어공부를 하기위해서, 뿐만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그 체류 중에 나를 믿지 않고 이리 저리 흔들어 대면서  경멸하던 사람들과 또 다시 긴 여행을 같이 하고 싶지  않았다는 설명을 듣고 나더니, 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런 일로그들이 고심하며 의심했던 일을 말끔히 해명 해주자, 그들이 감사한 마음을 드러냈다.


웨베르 부인은 다시 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


남편의 충고에 따라서, 내가 조선을 떠나있는 동안 어떤 개혁이 이루어져 왔는 가를 알려주려는듯했다. 그 말 가운데 부인은 ‘영국인’ ‘미국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학교들의 발전에 대해 여러차례 언급했다.


전신망의 확대정책에 대해서, 러시아 군대가 조선 군사 훈련을 시행하는데 대해서, 서울의 도로확장 에 대해서, 서울-북경간의 통로 확충에 대해서, 독립의 활성화에 대해서, 북조선 지역에 삼림벌목권을 러시아에  허가 해 준 일까지, 두루두루!!
밤 12시 30분이 되어서야 내 방에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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