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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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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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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기류변화가 전자속도 닮아가나 보다. 플로리다에 토네이도가 몰아쳐서 보트를 타고 시내를 다닌다거나 동북부 어디에 눈사태가 한 마을을 흔적도 없이 덮쳤다는 소식이 들리기가 바쁘게 이곳까지 그 여세가 맹위를 떨치며 들이 닥치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4시밖에 안됐는데 짙은 안개로 앞을 분간 할 수 없었다. 바람은 어찌나 세게 부는지 거리엔 꺾인 나뭇가지들이 엉겨 뒹굴고 간판들이 찢어지고 자빠져서 몸부림 치고 있었다. 어느새 눈발까지 뿌리기 시작하여 한시바삐 돌아가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운전을 하였다. 


어서 차를 들여놓고 따뜻한 안식처로 들어가야지. 한숨 돌리는데 차고 문이 열리지 않았다. 얼었나? 두 번 세 번. 누르다가 가로등이 꺼진 걸 보고 아차! 전기가 나갔다는 걸 퍼뜩 깨달았다. 


집안은 이미 냉장고가 되어가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현관에 들어서면서 전등스위치를 올렸지만 작은 비상등까지 꺼진 집안은 컴컴한 동굴 속 같았다. 굵직한 빨간 초에 불을 켜고 오랫동안 쓰지 않아 껌벅거리는 손전등을 찾아 곁에 놓고 소파에 웅크리고 앉았다. 연결이 되지 않는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여러 번 하였다. 


어느새 밤 11시, 전기가 쉽게 돌아올 것 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눈발은 좀 뜸해졌는데 바람소리는 기마전이 벌어진 전투장의 아우성이었다. 데크 위 가제보가 얼마나 세게 요동을 치는지 네 기둥이 마구 흔들렸다. 뒤뜰 백양나무가 온 몸으로 살풀이춤을 추는 게 그대로 지붕위로 덮칠 듯 보기에도 겁이 났다. 


여차하면 도망이라도 칠 듯 온몸은 잔뜩 긴장되었는데 머릿속에선 토막영상들이 ‘플래시 몹’으로 번쩍거렸다. 문득 무인고도에 갇힌 듯 막막했던 그 때 일이 떠올랐다. 몇 해 전, 때아닌 춘삼월에 몇 십 년만의 대폭설이 뉴욕 주를 강타하였다. 


버펄로 출발, 디트로이트 환승, LA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사태로 뉴욕 발 비행기가 2시간이나 버펄로에 연착하는 바람에 디트로이트 LA 환승 비행기를 놓쳤다. 우여곡절 끝에 LA도착은 4시간이나 늦게 되었다. 당연히 공항에서 연착안내방송을 하였으리라 믿고 마중 나올 친구를 기다렸지만 한 식경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공항안내원의 설명을 들은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펄로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늦었을 뿐이지 디트로이트-LA비행기는 정시에 출발하여 정시에 LA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공항전화를 내주며 친절을 베풀었지만 전화번호를 알 수 없었다. 도시이름도 동네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맥이 빠져 주저앉을 것 같던 그때 섬광처럼 비친 지혜가 인터넷이었다. 다음날 호텔로 데리러 온 친구는 만나자 웃기부터 하였다. 떠난 것은 확실한데 3시간이나 기다리다 돌아갔다고 한다. 간신히 큰 아들과 전화가 되었단다. “아, 우리 부모님이 언제 LA를 가셨어요? 염려 마세요. 우리부모님은 어떻게든 찾아오실 거니까요.” 혹시 딸은 알고 있을까 전화를 하였더니 금새 “아이 어떻게 해요. 찾으시면 제게도 좀 알려 주세요.” 하더라는 것이다. 


지금도 걱정을 끼친다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중이다. 갑자기 현관문으로 환한 빛이 비쳐왔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끄지 않은 채 큰아들이 뛰어 들어왔다. 걱정이 되어서 들려봤다는 것이다. 


‘그냥 전기 들어올 때까지 견뎌보겠다.’ 우물거리는 아빠에게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10분 이내에 빨리 준비하고 나와요’하며 나를 돌아보고 싱긋 웃는다. 


아들과 아빠는 도란도란 이야기가 많다. 나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의학용어도 주고받는다. 운전수가 바뀐 자동차 뒷좌석에 편안히 기대 앉아 새김질하듯 넉넉한 상념에 젖어 들었다. 


‘의학을 하려면 전문의를 해라’ ‘인술은 베푸는 것이지 자기 혼자 지니는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다.’ 아버지는 매사에 단호하였다. ‘요새 존엄사 문제로 논란이 많던데. ?’ 부자간의 대화가 화제를 바꾸었나 보다. ‘의사소통도 안 되고 육신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환자는 여러모로 무익한 손실이라던데. ?’ 


잠시 잠잠하던 아들이 입을 열었다. ‘갓난아이는 말도 못하고 몸도 추스르지 못해 먹여주고,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줘야 살지요. 장래에 뭐가 될지 모르면서도 부모들은 기쁘게 정성을 다해 기르거든요. 나고 죽는 건 의사의 소관이 아니에요.’ 


 나란히 앉은 두 어깨가 자동차바퀴 따라 흔들린다. 부자간의 천륜이 둥글둥글 굴러간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인정을 받을 때 울어나는 존재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호텔 체크인을 마친 아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휴가 많이 즐기세요’


아빠는 엄지와 곤지로 하트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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