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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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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변경선 동(東)과 서(西)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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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앙- 앙- 엄마 가지 마. 조금만 있으면 아빠가 올 텐데 가지 마. 앙- 앙-”

 할머니 치마폭에 매달려서 한 발작도 안 떼어놓는 것이었다.

 “‘영’이 갔다가 아빠 올 때 같이 와라 응”

 보다 못한 오빠가 발버둥을 치며 안 가겠다고 떼쓰는 ‘영’을 번쩍 들어 안고 나온 길이었다.

 “고만 들어가세요~”

 보이지도 않을 텐데 누군가 유리창에 대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쌔-애-앵- 쌔-애-앵- 하는 금속성을 내며 비행기가 활주로를 돌자 이제까지 느껴 울던 ‘영’의 울음소리가 다시 와-앙- 하고 큰 울음으로 변하였다.

 맹렬하게 손을 흔들고 계시는 어머니. 비행기를 향해서 두 손을 무작정 흔드시는 어머니의 손짓은 “잘 가라”는 것인지 “이리 돌아오라”는 것인지 알 수 가 없었다.

 “3년만, 어머니 3년만 기다리시면 돼요“

 활주로를 돌아서 하늘에 뜬 비행기는 영송 대 쪽으로 다시 가까이 오는듯하더니 그대로 높이 떠서 기수를 바꾸어 버리고 멀리 영송 대 위에는 주인 잃은 환송객들이 언제까지나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이윽고 그것들마저도 가물가물 사라져갔다.

 “아이~ 이젠 고만 좀 울어” 말하는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1967년 7월 26일, 동경 경유 ‘샌프란시스코’ 착의 이 전세기에는 대부분이 신학기에 대어서 미국에 공부하러 가는 유학생들로 차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라는 곳에 대한 기대가 풍선처럼 부풀었던 이들은 갑자기 바람이 빠진 듯 후줄근히 늘어진 모습이 되었다. 떠난다는 허전함과 미지에 대한 불안, 거기다 피로까지 겹친 듯 비행기가 뜨자 기내는 무거운 침묵이 뒤덮고 있었다. 이렇게 슬픔을 한 아름 안기 위하여 그렇게도 많은 시간을 동 분 서주하였던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버펄로까지 대륙을 횡단하여야 하는 여정을 가늠하다 심신이 허탈해져서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앉았다.

 딸그락 딸그락 점심을 나르는 스튜어디스들의 카-트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을 계기로 여기저기서 말소리 웃음소리가 일기 시작하고 기내는 삽시간에 부산한 움직임이 소용돌이 쳤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아직도 눈물자국이 번져있는 얼굴을 보며 옆자리의 청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버펄로 까지 가요”

 몸집이 큼직한 그 청년 김ㅇㅇ. 캘리포니아 대학에 엔지니어링 공부를 하러 가는 S공대졸업생이라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부군께서 그곳에서 공부하고 계신가요?”

 “아니에요 의사에요. 지금 ‘포스닥 펠로’로 일하고 있어요”

 “아 그러세요 의사들은 괜찮은 모양인데 전 아는 이도 하나 없고 참 걱정인데요” 김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캘리포니아엔 한국인이 많다지 않아요. 그보다도 난 우리가족 때문에 더 걱정이군요. 얼마나 있어야 다시 만날 수 있으려는지.”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돌아앉으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좀 마르고 안경이 유난히 커 보이는 그는 부인과 꼭 ‘영’이만한 아들을 하나 두고 간다며 ‘영’이를 자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기 아빠가 떠나시고 몇 개월 만에 가시는 겁니까?”

 “거의 6개월 되어가요. 초청장이 온 것은 2개월 후였는데 수속하는데 그렇게 시일이 걸리는군요.”

 “그렇게 빨리요? 의사들은 가족초청도 쉬운가보군요. 난 이제서 학생으로 떠나니 참 까마득합니다.”

 안경을 밀어 올리며 감탄을 하는 이 남자는 ‘캐나다’의 ‘토론토’로 경제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하였다. 이공계가 아닌 인문계라서 대우도 별로 신통치 않고 위로 뻗고 올라갈 기회도 좋지 않을 테니까 몇 년 고생하고 공부만 마치면 곧바로 귀국하겠다면서 ‘참 빨리 가서 좋겠습니다.’를 몇 번이고 되 뇌이고 있었다.

 비행기는 벌써 동해 상공을 나르고 있었다. 목화더미를 흩으러 놓은 것 같은 뭉게구름사이로 가끔씩 새파란 하늘이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 비행기 앞날개에 쏟아지는 햇살만이 하얗게 반사되고 있었다.

 

  2)

 남편의 도미 송별연에서였다.

 “아니 ‘딱 터 송’ 사모님은 어떻게 하고 혼자 떠나나?”

 ‘숙’을 흘깃 쳐다보며 넌지시 던지던 과주임의 말씀에

 “하이 선생님 두 아 이런 때 한번 재미 보게 놔두시지 뭘 그러세요.”

 와 하 하하하-

 “미국 간호 양들은 ‘딱 터’면 고만 입디다. 흰둥이고 노랑둥이고 없다니 까요. 아 글쎄..아얏..”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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