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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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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장애인공동체 기획시리즈>

차상원(회원)

 

 처음엔 내 이야기를 글로 쓴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컸다. ‘병신 된 것도 서러운데 남들에게 광고할 일 있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글을 요청하신 분(민혜기 사모님)에게 화를 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언가 필요한 일이니 그러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그런 나를 에둘러 응원해주었다. 3주 전 ‘우리들의 이야기 나누기’ 시간에 공동체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그리고 오늘 인터뷰에 나선 것도 모두 아내의 응원 덕분이다.

 

 공동체에 나오는 회원 모두 그러시겠지만 나도 내가 장애인이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살아오는 동안 장애인을 많이 봤다. 붐비는 시장바닥에서 고무 튜브로 둘러싼 하반신을 질질 끌면서 구걸하는 사람이라도 볼라치면, ‘저 사람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저렇지? 저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지’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나는 외아들로 아버지의 훈육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자랐다. 어머니도 “너는 아빠가 안 계셨으면 키우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한마디로 철부지였다.

 

 2009년, 술을 마시러 밖에 나갔는데 깨어보니 병상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길에 쓰러져 있는 나를 보고 911에 신고하여 목숨을 건진 것이다. 더 큰 일은 그 다음이었다. 퇴원하여 지내던 중 그리 심각하지 않은 일로 입원했다가 뜻밖의 감염이 진행되어 지금과 같은 장애를 입게 된 것이다. 이 충격으로 한국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암이 재발하여 끝내 돌아가시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임종도 참석하지 못한 불효한 아들을 눈물 흘리시며 마지막까지 부르셨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손자가 병을 얻고 그로 인해 아들까지 잃게 된 충격이 얼마나 크셨을까! 나는 조상들에게 두루 불효한 자손이 되고 말았다.

 

 그 무렵은 교회를 다닌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절망감에 예수님과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은 믿음 주고 구원 주시는 분인데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세요?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데려가세요’라고. 그런데 아내의 기도는 내 원망과는 조금 달랐다.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차씨 집안에 시집와 이런 시련을 겪게 하는 겁니까?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제발 저의 남편, 살려만 주세요’였다. 아내의 기도 때문이었을까? 하루는 병상에서 비몽사몽 간에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뜨거운 불이 내 몸을 확 비추는 것이었다. 이게 뭐지?’하고 눈을 떴는데 어떤 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상원아, 이제 일어나야지!’ 하시며 내 다리를 잡고 쓰다듬어 주셨다. 그 체험을 한 이틀 뒤 나는 일어났다.

 

 퇴원은 하였으나 집에 돌아온 나는 더는 과거의 쾌활했던 내가 아니었다.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러던 중 교회에 청년부 전도사님이 한 분 오셨다. 그분은 한국에 계실 때 대학병원의 물리치료실에 근무하셨다고 했다. 남편의 사역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찾던 중에 그분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나와 같은 장애인들을 지금까지 돕고 있다. 정성으로 돌봐주신 그분 덕택에 1년이 지난 뒤에 나는 워커로 보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은 내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면 오히려 “차 집사님을 보면서 제가 더 감사해요, 이렇게 하나님의 뜻으로 나에게 봉사할 기회를 주셨으니 감사하지요”라고 하신다. 그분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나를 포함하여 공동체 회원을 위해 봉사하고 계신다.

 

 내가 투병하는 동안에 성장기를 보낸 우리 아이들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큰아이가 지금은 훌쩍 자라 나를 이해하고 많이 돕지만 둘째는 나하고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그 아이 기억에 아빠는 항상 아파 있었던 존재였다. 가족 상담을 했을 때의 일이다. 작은 애가 그린 그림에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형만 있고 자신은 밖에서 노는 상황을 그려 놓았다. 그림을 본 캐네디언 상담사는 ‘혹시 아이가 어렸을 때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엄마 아빠랑 같이 안 지냈는가?’라고 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내와 나는 많이 울었다. 내가 이렇게 되고, 아내는 나를 돌보랴, 큰애 돌보랴 너무 힘이 들었다. 부득이 둘째를 한국에 보내 외가에서 지내도록 했었다. 그런 연유로 아이는 자기가 집안에서 거추장스러운 존재라고 인식했을 것이고, 그것이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게 된 것이다.

 

 인생이 덧없음을 이모가 돌아가시고 실감했다. 이모가 병석에 계실 때 어머니는 “예수님이 너를 깨워 주신 것 같이 이모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네가 기도 좀 해다오” 하셨다. 내가 집안에 전도사가 된 기분이었다. 가끔 어머니는 나에게 ‘네가 행복의 통로다’라고 하신다. 우습게도 우리 부부의 혼담이 오갈 때 양가 모두 서로 예수를 안 믿으니 좋다고까지 했었다. 그런데 아내가 내 일을 겪으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어머니도 믿게 되셨다. 끝내는 장인 장모까지 예수님을 믿게 되셨다.

 

 처음 내가 쓰러졌을 때 어머니는 거의 실신하셨다.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가니 점쟁이는 ‘누가 뒤에서 나를 잡고 있다’라고 했다 한다. 그것을 풀려면 굿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강고하신 아버지도 마음이 약해지셔서 굿을 고민하셨다고 한다. 예수님 안 믿었으면 삼천만원 주고 굿을 할 뻔했다. 이제 아버지를 뵈올 순 없으나 부모님이 여기 오셨을 때 큰애 데리고 함께 찍은 사진을 침대 머리맡에 걸어두고 있다. 요즘 들어 그 사진을 보며, ‘어른들 말씀은 틀린 것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돌이켜 보니 내 삶의 중요한 전환점에는 항상 곁에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원래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분 조카딸이었다. 아내를 보자마자 홀딱 반한 내가 양가 부모님들을 설득하여 2002년 1월에 결혼하게 되었다. 캐나다 이민 신청을 할 때도 나와는 달리 이민 카테고리의 상위 직업군에 속한 아내 덕분에 이민 수속이 수월했다. 나는 모든 이민 케이스가 우리처럼 쉬운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주공사에서는 수속비용을 할인해 주면서 우리의 케이스를 광고로 삼자고 할 정도였다. 신청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영주권이 나왔기에 나는 영주권 취득을 위해 적성과 무관하게 다녀야 했던 센테니얼 아카데미 자동차학과를 그만둘 수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해 오던 여행사 가이드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이 때문이었다.

 

 성인장애인공동체도 아내의 권유로 나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금 내가 장애인이 됐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라는 거야 뭐야!’라고 소리치며 화를 냈다. 하루는 마지못해 공동체에 나갔다가 내 평생의 존경할 만한 멘토를 만나게 되었다. 동갑내기이며 전임 회장인 유홍선 사무장이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더 빠르고 더 열정적이었다. 누나와 여동생들 틈에 끼어 응석받이로만 자랐던 나였기에 그의 모습과 행동은 나에게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뿐 아니었다. 공동체에는 어머니, 누나 그리고 동생 같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내 어머니는 평소에 “나는 너희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형제간에 너희만큼 우애하는 걸 못 봤다”라고 하시며 항상 자식들을 다독이셨다. 누나와 동생들은 지금도 나하고 전화를 할 때면 내가 안타까워 모두 운다. 형제애가 두터운 우리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내 혈육과 같은 분들을 만난 것이다. 어디서 이런 분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어디서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나는 이 행복이 어느 순간에 깨져버리지나 않을까 두렵다. 이런 속마음을 내가 의지하는 공동체의 누님 한 분에게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온몸으로 열성을 다하시는 봉사자분들이 계신다. 나는 이런 분들을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봉사활동을 해봤기 때문에 안다. 공동체에 몇 번 다녀가신 어머니도 나보고 하시는 말씀이 ‘운동 갈 때는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하더니, 공동체 갈 때는 그렇게 밝을 수가 없구나’ 하셨다. 표정도 마음을 숨길 수는 없는가 보다. 헌신해 주시는 봉사자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내 표정이 그토록 밝을 수 있었겠는가?

 

 한번은 아직 어린 큰아들을 데리고 공동체에 간 적이 있었다. 공동체를 다녀온 후 아이가 엄마에게 그랬다고 한다. “난,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아픈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우리 아빠는 아픈 것도 아니야. 더 심하신 분들도 있는데 내가 아빠한테 했던 것처럼 그분들에게도 잘해줘야 할 것 같아”라고. 그저 감사할 뿐이다.

 

 공동체에는 고마운 분들이 많지만, 그중에도 민혜기 사모님과 유홍선 전임 회장, 그리고 설립자이신 정동석 목사님은 나를 구원해주신 분들이나 다름없다. 생각해 보면 나와 같은 사람들이 한인사회 내에 많을 것 같다. 장애인공동체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서 안 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여기 몇 번 와보면 그런 생각이 다 없어질 것이다. 나는 나의 좋은 경험을 그분들과 나누고 싶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조금만 더 나아진다면 남에게 더 봉사하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우리 공동체를 더 알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는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원고는 구술생애사 작가 김동환님께서 성인장애인공동체 차상원 회원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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