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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장애인공동체와 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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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리아(회원)

 

45년 전, 한국에서 의류 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던 나는 부모님, 오빠와 상의한 끝에 1974년 7월에 캐나다에 이민을 오게 되었다. 나의 본명은 장정혜이고,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래서 가족들은 나를 항상 ‘찌끄러기’라고 불렀다. 학교는 덕성여대 의상과를 졸업하고 의상디자이너로 1971년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

 

이민 온 한 달 후 이곳에서도 디자이너 경력으로 유대인 회사에 직장을 잡았다. 거기서 컷팅과 패턴 뜨는 직책으로 일을 시작하여 2년 정도 일을 한 다음 1976년 초에 결혼했다. 그리고 에드먼턴으로 이사를 하여서 8년을 살다가 토론토로 다시 돌아와 가게를 열었다.

 

가게를 하는 동안에 남편은 도움을 주지 않았다. 몹시 힘들었다. 가게를 하면서 먹지도 못하고 쉬는 날도 없이 일하다 보니 몇 차례 유산하게 되어 현재 자녀는 없다. 남편은 외도하였고 이혼 후 혼자 지내왔다.

 

첫 번째 스트로크는 2014년 7월에 찾아왔다. 에드먼턴에서 토론토로 이사 후 7년 반 동안 운영해오던 비즈니스를 접은 바로 한 달 뒤였다. 비즈니스 하느라 식사도 잘 못하고, 잠도 잘 못 잘 뿐 아니라 쉬는 날도 없었다. 일에 빠져서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스스로 몸을 해친 것이다. 그렇게 오래 일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늦게야 들었다.

 

스트로크의 조짐은 있었다. 비즈니스를 정리하려고 주인과 협상을 했으나 원만치가 않았다. 그러던 중 6월에 가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다. 병원에 갔더니 전문의가 ‘스트로크의 전조’라고 했다. 그래서 ‘이거 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준 약을 먹다 중단해버렸는데 한 달이 지난 7월에 쓰러진 것이다.

 

혼자 집에서 밥을 먹을 때였다 ‘이러다간 안 되겠다, 병원에 가야겠다’라고 생각을 하는 데 나도 모르게 쓰러져 버렸다. 결과적으로 이런 생활환경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가 겹쳐 뇌졸중이란 병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쓰러졌을 때도 의식은 희미하게 있어서 병원에는 전철 타고 버스 타고 내 발로 걸어서 들어갔다.

 

병원에 도착해 간호사에게 이야기하니 CT를 찍자고 했고 검사를 하더니 그 즉시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언제 의식이 사라졌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 후 1주일 만에 의식이 깨어났다. 의식을 차린 3주 후에 완쾌되지도 않은 몸으로 살던 집이 팔릴 것 같다 해서 한 달 만에 퇴원했다. 그 뒤로 두 번째 스트로크가 올 때까지 나는 오른쪽 편마비 장애를 갖게 되었다. 이때가 내 나이 65세였다.

 

가족력이 없었던 나에게 스트로크라는 것은 생소한 병이었다. 뭐가 뭔지, 어떻게 증상이 달라지는지, 병에 대한 정보가 통 없었다. 힘은 들었어도, 그 당시에는 병에 대해 워낙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힘든 줄도 몰랐다. 이렇게 그냥 사는가 보다 했었다.

 

손위에 일곱째 언니가 있었는데 병원에서 어떻게 연락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입원한 지 1주일이 지난 뒤에야 병문안을 왔다. 내가 혼자 집을 나서면서 병원을 간다고 했다. 며칠 동안이나 집을 안 들어갔는데도 혼자 병원에 간 동생이 궁금하지도 않았는지 무척이나 서운했다.

 

두 번째 스트로크는 2015년 10월에 왔다. 그 해 4월에는 오빠 산소에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내가 탄 휠 트랜스가 서 있는데 뒤차가 우리 차를 추돌한 것이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나는 2년 이상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몇 달도 안 되어서 체중은 15kg이나 빠지고 노인이 다 되어버렸다. 이런 상태에서 스트로크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왔다. 첫 번째 스트로크가 찾아온 지 1년 3개월 만이다. 병원에는 넉 달을 입원해 있었다. 보통 한 병원에서 3개월까지만 입원할 수 있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서 한 달을 더 있었다.

 

첫 스트로크가 왔을 때는 병원에서 치료를 잘해줬고, 회복도 빨랐다. 언어장애로 말을 못 하다가 말도 하게 되고 왼쪽에 편마비가 왔는데 치료받고 왼쪽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점점 나아지겠지 했다.

 

그런데 나에게 제일 충격을 준 것은 두 번이나 겪은 스트로크가 아니다. 바로 혈육인 친언니의 동생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처음 스트로크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언니는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나를 찾아왔다. 언니는 나에게 전화도 잘 안 한다. 한번은 1년하고도 서너 달이 지난 다음에서야 나를 찾아왔다.

 

또 한 번은 생일이라고 선물을 사다 주었는데 너무 비싸서 내가 가서 물리고 돈으로 받아다가 쓰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것을 가져가 자기 딸에게 주고 나한테는 아무것도 주질 않았다. 지금은 서운한 마음뿐이다. 언니는 먼저 이민 와있던 나에게 초청 부탁을 해서 내가 스폰서가 되어 주어 캐나다에 올 수 있었다.

 

병원에 있을 때 하도 병문안을 안 와서 얘기 중에 ‘내가 언니 스폰서’라고 했더니 ‘듣기 싫다’라고 했다. 스트로크가 온 사람은 생각과 몸이 다르게 움직인다.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꼭 받아야 하는데 도움을 청하기가 점점 싫어졌다.

 

결국은 내가 밥을 못 해먹으니까 언니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면 언니는 “나는 국을 안 먹는데 너 때문에 싫어도 먹는다“는 식으로 내 탓을 한다. 그러면 끓이지 말라고 했다. 맘속으로는 아주 서러웠다. 아마 오빠가 살아 계셨으면 언니의 무관심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빠는 연극도 하시고 방송도 하신 재능이 많으신 분이었다. 지금의 얼 TV 토론토 한국방송을 하시면서 내 일도 많이 도와주셨다. 그나마 오빠와는 가까웠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더욱더 그립다.

 

첫 번째 스트로크 때는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나 두 번째 스트로크 이후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 있다. PSW(Personal Support Worker)를 신청하고 10개월 넘게 기다렸다. PSW가 오면 일주일에 두 번을 방문해서 목욕도 시켜주고, 청소도 해준다. 밥만 내가 데워 먹으면 된다.

 

그런데 PSW도 각기 다르므로 나하고 맞아야 한다. 그 사람들이 오히려 클라이언트를 힘들게 하는 부분도 있다. 나는 PSW와 세 번의 트러블이 있었다. 동양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번은 흑인 PSW를 시장에 보냈는데, 2시간짜리가 20분을 남겨놓고 돌아왔다. 그래서 항의 했더니 “처음에 시장가면 목욕 안 시켜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는 거다. 우리 집에서 시장 갔다 오는 데는 20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래서 난 “20분 안에 목욕을 시켜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목욕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오라는 것이다. 집에 가야 한다고.

 

이런 일을 겪고도 말을 못하면 회사에 리포트도 못하고 아픈 것도 서러운데 무시까지 당하면 너무 힘들다. 시장 가서 받아온 영수증에 보니까 10분 동안에 시장은 다 봤다. 그래서 그 영수증을 첨부해서 기관에 항의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서 보내왔다. 이런 일을 겪은 후, 지금은 PSW와 잘 지낸다.

 

2015년 한 해는 나에게 힘든 일들이 여러 가지로 겹쳤다. 어렵게 집을 팔고 이사를 했고, 교통사고가 났고, 두 번째 뇌졸중이 찾아왔다. 일을 못 하니까 돈도 안 들어오고, 그때는 65세도 안 돼서 정부 보조금도 받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연금은 받지 못하고 TTC(Toronto Transit Commission, 토론토 교통국) 무료이용, 치과에서 발치와 틀니 2가지, 그리고 CPP(Canada Pension Plan, 캐나다 은퇴 연금)만 혜택을 받고 있다. 스트로크 오기 직전에 했던 비즈니스에 대한 소득신고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6년 이후는 했는데 2015년 이전의 세금 보고는 지금 준비 중이다.

 

주변에서 도움을 청하라고 하는데, 도움을 받아서 할 일은 아니다. 내가 하루에 컴퓨터로 계산해서 조금씩이라도 준비하고 있다. 변호사나 회계사에게 의뢰하더라도 내가 분류를 다 해줘야 한다. 현재 나는 캐나다 영주권자이다. 시민권을 신청했지만, 마지막 인터뷰에서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을 묻는 바람에 떨어진 적이 있다. 그 다음부터는 시민권 신청을 하지 않았다.

 

스트로크라는 게 잠을 못 자기도 하고 밥도 못 먹고 다른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스트로크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증상이 많이 나타난다. 약을 먹으면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받아오지 않았는데 이제는 먹고 있다. 치과를 갔는데 내가 자꾸 소리를 내서 치료를 못 한다고 해서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 치과에는 정부에서 시니어 무료치료 시행 전에 갔었는데 그때는 딱 두 가지만 무료였다. 치아를 빼는 것과 틀니 하는 것이었다. 싸는 것도 무료가 아니라고 해서 지금 하다만 상태이다. 그러니 내가 자비로 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 그래서 잇몸으로 음식을 먹고 있다.

 

사진을 찍어서 이를 빼는 치과의사에게 보내야 하는 데 거기서는 어떤 것을 뽑아야 할지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고 해서 다시 찍으라고 했다. 다시 찍는데 $100이다. 의치하는 데 이백 몇십 불이 든다고 했다. 제도 시행 이전에 갔기 때문에 무료가 안 되는 것들은 내가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스트로크가 오기 전 힘들게 가게는 했지만 좋은 기억들도 있었다. 돈보다도 손님 중에 나를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중심을 두고 가게를 운영했다. 돈을 내고 내 기구를 쓰지만, 혹시 그 사람 중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비즈니스를 하였다. 내가 누군가를 인도한다는 생각으로 세 사람을 구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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