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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사변 70주년을 맞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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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연 (한카노인회 전 회장)

 

6. 25 사변이란?

6.25사변은 우리나라 역사상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사건이다. 때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북한 김일성 일당은 평화롭던 대한민국을 하루 아침에 삼켜버리려고 242대의 전차를 앞세워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1950 6 25일부터 서울 함락 28일까지

필자는 당시 서울운동장 건너편에 위치한 덕수 중학교 5학년 (현재 고등학교 2학년)학생으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70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게 되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6.25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6.25가 남침이다 북침이다 하고 각자 의견들을 말하고 있으나, 필자가 겪은 내용을 읽어보면 6.25에 대한 내용을 확실히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쉬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성동구 신당동에 위치한 성동고등학교 이웃에 거주하고 있었다.

 

볼일이 있어 오전 10시경 을지로 6가 근처를 지나가는데 군용차량들이 “국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 복귀하라”는 방송을 하면서 지나간다. 서울 시민들은 무슨 영문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 역시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할 뿐이다. 전쟁이 났다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하였었다.

 

6월 26일은 월요일이다.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설명을 한다. 북한의 김일성 일당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국군이 곳 모두 퇴각시키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그날은 그런대로 단축수업을 하였다.

 

6월 27일 화요일에 학교에 갔더니 곧 UN군이 참여하여 적군을 퇴각시키니 안심을 하라고 전한다. 그러나 그날은 수업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야말로 큰일이 난 것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을지로 6가에 Medical Center Hospital이 있다. 그 병원 옆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병원 담으로 안을 들여다 본다. 당시 병원 울타리는 나무 판으로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호기심이 생겨서 나도 병원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병원 주차장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러면서 군용차량들이 계속 병원에 왔다 갔다 한다. 군용차량들은 군인 부상자들과 사상자들을 병원으로 싫어 나르는 차량들이다. 지금 생각하여도 끔찍한 장면이다.

 

6월 27일에 북괴군을 물리친다고 하더니 오후가 되니까 피난민들이 북쪽에서 밀려오기 시작한다. 우이동과 미아리고개를 넘어오고 있다. 당시는 피난민들이 우마차를 끌고 우마차 위에 짐을 싫고 아기들은 우마차를 타고 오기 시작한다. 서울시내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안심하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별일이야 없겠지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니 모두가 불안하여진다. 그래서 신당동에 거주하고 있는 많은 주민들이 신당동 뒷동산(현재 대경상고 자리)에 올라가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그날 저녁은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모두들 비가 내리는 것에 대하여 아랑곳 하지 않았다.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나 역시 그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저녁 12시경이 되니까 국군 패잔병들이 우리가 있는 산마루 쪽으로 퇴각을 하면서 “미안합니다”하면서 지나간다.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신당동 거주자로써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밤새껏 산 언덕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6월 28일 새벽 5시경 날이 밝아온다. 날이 밝아오니 신설동쪽에서 “인민공화국 만세” 하면서 인민군들과 일부 시민들이 합세하여 외치고 있다. 상황은 끝이 났다. 산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서울이 함락되어 인민군 손에 들어간 것이다.

 

1950 6 25 전의 서울 풍경

여기서 잠깐 6.25가 발발하기 전, 서울의 현황을 알아보자. 필자는 당시 중학교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내용을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당시 많은 공산당원들이 서울 시내 곳곳에서 암약을 한 사실들은 기억한다. 왜냐하면 아침이면 곳곳에 삐라(벽보)가 붙어있다. 특히 시내 복판에 있는 건물의 기둥에는 삐라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삐라의 내용은 공산당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들이다. 그것을 파출소 직원이나 동사무소 직원들은 떼러 다닌다. 그런 광경을 많이 보았었다. 당시 서울뿐만 아니라 남한 내에 얼마나 많은 간첩이나 공산당원들이 활동하였는지 알 수 있다.

 

6.25사변을 일으킨 김일성 일당과 스탈린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한 침략에 대하여 승인을 얻고자 수차 부탁을 하였으나 스탈린은 아직 때가 이르다고 승인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이 끈질기게 요구하여 48번 만에 승인을 하여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하였고, 작전계획서까지 작성하여 주었다고 한다.

 

스탈린이 여러 차례 김일성의 남침을 거절한 이유는 아직 시기가 되지 아니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중국의 공산 통일과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승인하여 주었다고 한다.

 

애치슨 라인이란?

애치슨 라인이란 1950년 1월 12일 당시 미국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발표한 선언이다. 이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대만의 동쪽과 일본의 오키나와 및 필리핀을 연결하는 방어선이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대한민국은 방어선에서 빠졌다는 사실이다. 이를 미국의 상원외교위원장이 1950년 1월 12일 대외에 발표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에 한반도는 당시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시켰었다.

 

김일성은 이때를 기하여 소련의 스탈린 면회를 요청한다. 남한을 침략하기 위한 허가를 받기 위해서다. 북한 김일성 일당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중공의 모택동과 소련의 스탈린의 지지와 협조를 얻는다. 승인을 받은 김일성 일당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남침을 감행하기 위하여 38도선 이남으로 침략하였다.

 

 이에 무방비상태의 한국에서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서는 토의 끝에 한국에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 7월 7일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를 총 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유엔군 사령부는 일본 도교에 본부를 두고 작전 지휘를 하였다.

 

 인민군들은 무방비 상태였던 남한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침략 점령하였다. 이에 유엔 연합군은 낙동강 결전을 전개하였다. 이때에 연합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전개하며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하여 10월 10일에는 북한의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11월 중순경에 중공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로 인하여 1월 4일에 또다시 서울을 빼앗겼다. 그러나 3월 15일 다시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다.

 

이 와중에 북한의 남로당은 한국 내부 전복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로당을 제압하려는 한국 정부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과 방위군 사건 등이 발생하였다. 이후 3년간 계속된 전투로 인하여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이 사상하였으며,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53 7 27 휴전협정 체결

6.25사변은 3년 1개월 2일만인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휴전 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도 군사분계선에서는 크고 작은 군사적 분쟁이 계속되어 왔다. 1950년 6.25전쟁은 국제연합군과 중국 및 소련까지 관여한 세계 2차 대전 이후 최대의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6.25사변에 참여한 UN 인민군과 사상자들

UN군 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6.25사변에 참여한 한국군은 1,090,911명으로 집계되었으며, UN군은 미국 480,000명, 영국 56,000명, 캐나다 25,687명, 터키 14,936명,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필리핀 7,420명, 태국 6,326명, 네덜란드 5,322명, 콜롬비아 5,100명, 그리스 왕국 4,992명, 뉴질랜드 3,794명, 에티오피아 제국 3,518명, 벨기에 3,498명, 프랑스 3,421명, 남아프리카 연방 826명, 룩셈부르크 83명 등이다.

 

또한 의료부대로 스웨덴을 비롯하여 노르웨이, 이탈리아, 덴마크, 인도 등에서 3,759명이 참여하여 총 인원 1,719,579 명이 참여하였다.

이에 공산군은 인민군 800,000명, 중공군 1,350,000명, 소련군 26,000명 등 총 인원 2,150,000명이 참여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양측의 피해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한국군 전사자 149,005명, 부상자 710,783명, 실종자 132,256명이다. 또한 민간인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민간인 사망자 37,599명, 부상자 229,625명, 실종자 303,212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총 사망자는 186,604명이며, 부상자는 940,408명이며, 실종자 435,468명으로 총계 1,562,48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미국 군인 전사자 36,574 명, 부상자 103,284, 실종자 3,737명, 포로 4,439명 합계 148,034명을 비롯하여 UN 각국의 합계는 1,500,000여명이다.

 

이에 비해 인민군은 군인 전사자 294,000명, 부상자 226,000명, 실종 및 포로 120,000명이며, 민간인 사망자 406,000, 부상자 1,594,000명과 실종자 680,000명 등 총 사망자 700,000명, 부상자 1,820,000명, 실종자 800,000명으로 총 합계인원은 3,320,000명이다.

 

또한 중공군의 사상자 및 실종자와 포로를 합하면 592,000명이며, 소련군도 전사자와 부상자 815명을 합하여 1,190,000명이며, 총합계는 1,577,000명 이상이다.

 

상기와 같이 남, 북간에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특히 민간인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남북간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다. 개인적으로 계산하여 보면 한 가족당 1명 이상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명피해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입었다. 남한의 일반 공업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공업의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

 

6.25사변이 발발 한지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또한 휴전협정을 체결한지 6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도 호시탐탐 남침만 엿보고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청와대에 있는 모든 참모들, 각 장관들과 여당 국회의원들은 북한의 김정은이나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듯하다.

 

그들은 아무리 협정을 하고 계약을 하고, 약속을 하여도 자기들이 불리하면 하루 아침에 모든 계약을 파기한다. 그런 무리들과 체결이나 약속을 믿는 것은 오직 죽음만을 초래할 뿐이다. 위정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70대, 80대 이상의 노인들 피땀 흘려 세워놓은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질까 걱정이 앞선다.

 

김일성 장군과 김성주

필자는 충청도 면소재지에 위치한 작은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를 다녔다. 1942년도 왜정시대 국민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생각난다. 당시는 왜정시대이기 때문에 교장 선생님은 당연히 일본사람이며, 선생님 중에도 일본사람이 많이 있었다.

 

필자의 담임선생님은 한국 분이었다. 이름은 생각이 안 나지만 성은 임(林-일본 발음으로 “하야시”)선생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애국자였다. 김일성과 독립군에 대하여 가끔씩 선생님은 설명을 하여주었다. 그러면서 이 말은 절대 나가서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 부탁한다. 만일에 일본 사람이 알게 되면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바로 체포한다고 한다. “네가 박사야! 잠깐 이리와”하면서.

 

문헌에 의하면 진짜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37년 11월 13일 일만군(日滿軍)과 교전 끝에 36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1942년도에는 이미 전사한 김일성을 모르고 담임선생은 설명하였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대전이 끝나자 북한의 가짜 김일성은 원래 본명이 김성주로써 1912년 4월 15일생이다. 김성주는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만주지역에서 항일운동도 많이 하다가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군에 입대하여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는 소련군 소령으로 북한으로 들어왔다.

 

가짜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 영도자였다. 1948년 9월 9일부터 1972년 12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을 지냈고, 1972년 12월 28일부터 1994년 7월 8일 사망 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를 지냈다.

 

반미 종북 분자들인 대한민국의 주사파들은 이른바 ‘백두혈통 왕국’의 시조이자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전체주의 독재자 ‘가짜 김일성’을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이라고 외치며 신주(神主)모시듯 받들어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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