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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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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6)-밀라드 필모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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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이름: Millard Fillmore

출생: 1800년 1월 7일 뉴욕 주 모라비아

사망: 1874년 3월 8일 뉴욕 주 버팔로

부인: 애비게일 파워스, 1836년 결혼

     케럴라인 맥킨토시, 1858년 재혼

특성: 모르쇠당(Know Nothing Party) 창당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13대, 1850년 7월 9일-1853년 3월 4일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39/44

소속정당: 반 메이슨당, 위그당, 모르쇠당, 민주당

업적: 페리 원정대를 보내 일본과 통상무역 협정으로 일본개화 및  아시아 진출

인용구; 노예제도는 필요악이다


 

성장과 교육(1800-1825)

밀라드 필모어는 1800년 1월 7일 뉴욕주 핑거 레이크지역 케유가 카운티의 모라비아 통나무집에서 부친 나싸니엘 과 모친 피비 필모어 사이의 8자녀중 2째로 태어났다.
 

가난했던 부친은 가족과 함께 버몬트주에서 케유가로 이주하여 농토를 임대하여 애들 교육은 생각지도 못하고 의복제조업주로부터 돈을 받고 14살의 밀라드를 재단사 견습생으로 팔아 생계를 의지해야 했다.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는 견습생활을 하면서 주인책을 몰래 빌려본 밀라드는 변호사되는 꿈을 갖게 되었고 30달러를 융자하여 견습비용을 갚고 집으로 돌아와 낮에는 농사일을 저녁엔 도서관책을 빌려와 독학을 게을리 지 않았다.  


1819년 밀라드는 시골학교에서 초등교육부터 시작하여 부친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부친은 자신의 임대주인 월터 우드 판사에게 부탁하여 밀라드는 우드 판사 밑에서 법을 공부할 수 있엇다.


1821년 밀라드는 농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부수입을 올렸고 버팔로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1823년 변호사 자격증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개업을 하였다.

 

 

결혼(1826)

1819년 농촌학교에서 선생으로 만난 애비게일 파워스는 밀라드보다 두살 위였다.

애비게일은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밀라드가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끊임없는 격려와 용기를 부여했다. 둘은 젊음의 외로움을 달래며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1821년 약혼을 하고 결혼은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미루며 결혼 목표를 향해 달렸다.

 

1819년 부친이 이스트 오로라에 농장을 구입하여 생활이 윤택해지고 1823년 밀라드도 변호사업으로 수입이 보장되어 밀라드와 애비게일(1798년 3월 13일생 – 1853년 3월 30일 사망)은 1826년 2월 5일 화촉을 밝히고 곧 아들 밀라드 파워스 필모어와 딸 메어리 애비게일 필모어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정치입문(1828-1831)

필모어는 부친이 모라비아지역의 치안판사로 재직하는 것을 목격하고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828년 필모어는 잭슨의 정책을 반대하는 반 메이슨당에 가입하여1829년부터 1831년까지 알바니 대표 뉴욕주의원직을 겸하면서 버팔로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일했다.

그는 채무자들이 채무불이행시 체형 받는 뉴욕 주법을 없애는 법을 상정, 통과시켰다.


 

연방 하의원(1832-1843)

1832년 필모어는 위그당에 전역하여 초선으로 연방 하의원에 당선되었다.

그후 1837년부터 1843년까지 3선 연방 하의원으로 방법 및 수단 위원회 의장을 맡고 1842년 관세를 20%에서 40%로 올렸다.


필모어는 쿠인지 애덤스, 해리슨, 클레이와 정치이념을 같이 하며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고 노예제도를 반대했지만 ‘노예제도는 필요악’이라고 미 남북이 극한적으로 대립되는 정세를 판단한 의견을 갖고 있었다.

1842년 위그당은 필모어를 미하원에 재공천 했지만 필모어는 수락하지 않고 버팔로로 돌아와 변호사업을 계속했다.


 

중견정치인(1843-1847)

1844년 쿠인지 애덤스는 필모어를 클레이 대선후보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 후보공천을 주선했지만 1844년 대선에서 민주당 포크에게 패배 당했다.

1846년 필모어는 버팔로 대학을 공동 설립했고 사망시까지 챈슬러로 지냈다.

 

1847년 필모어는 뉴욕주 감사원에 선출되어 뉴욕 주설립은행이 연방정부의 채권을 사들여 달러의 안정세를 유지하는 공을 세웠다.

 


1848년 대선(1848)

1848년 6월 7일 전당대회에서 위그당은 멕시코전쟁의 영웅이 된 자카리 테일러를 대통령후보에 공천하였다. 노예를 거느리는 테일러는 남부의 표밭을 확신할 수 있었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북부의 표를 잡기 위해 필모어를 부통령 후보에 공천하였다.

그들은 지명을 받고 1848년 대선에 승리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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