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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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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5)-앤드류 잭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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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오얼린스 전투(1815년 1월 8일)


 

제 2 미 독립전쟁 영웅(1812-1815)

1812년 미영전쟁이 발발하자 잭슨은 자비를 들여 2500여명의 민병대를 소집하였으나 매디슨 대통령의 인가를 받지 못했다.
 

1813년 1월 2천여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영군과 원주민 연합군대와 전투를 계획했으나 매디슨은 잭슨을 인정하지 않아 민병대를 해체 시켜야 했다. 동년 8월 계속 영군에게 패배를 당하던 매디슨은 영군과 합세하여 미 정착인을 학살시킨 레드 스틱스 원주민을 잭슨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다.  


2014년 1월 25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플로리다 서쪽의 레드 스틱스 원주민 전사를 궤멸시키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6월 8일 매디슨은 잭슨을 준장으로 인정하고 10일 후 미 육군소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매디슨의 인가를 받고 레드 스틱스 원주민들로부터 9만3000 평방 킬로미터의 토지를 착취하여 미 정부에 기증하였다.


11월 잭슨은 계속 스페인과 영국을 돕는 원주민을 공격하며 스페인이 소유하는 플로리다 서쪽을 침략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잭슨은 대서양과 미시시피강을 잇는 뉴 오얼린스를 점령하기 위해 영군이 대거 출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 오얼린스 전투(1815년 1월 8일)

1814년 8월 미영 양국은 겐트 평화조약을 협정 진행하고 있었다.

10월 24일 영국의 헨리 베서스트 국방장관은 나폴레온 전쟁과 대륙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에드워드 퍼켄햄 소장에게 비밀리에 미 남부 뉴 오얼린스를 공격 탈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800년 스페인은 나폴레온의 압력으로 루이지애나 지역을 프랑스에 반환하게 된 후 1803년 나폴레온이 미국에게 1500만달러에 매도한 계약을 무효로 하고 루이지애너 지역을 점령하여 스페인과 반분하자는 의도였다.


12월 1일 뉴 오얼린스에 도착한 잭슨은 뉴 오얼린스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 정규군, 지역 의용병, 민병대, 착토우 원주민전사, 프랑스 해적단을 합친 5,700여명의 군사를 일으켜 총지휘를 맡았다.


12월 23일 오전에 8,000여명의 영 정예군이 미시시피강에 도착하여 서쪽 강둑에 진을 치고 있었다.


잭슨은 군함 2척과 육군을 동원하여 영군진영을 기습 공격하여 미군을 오합지졸로 본 퍼켄햄 소장을 놀래게 했고 영군의 총공격을 지연시켰다. 


12월 24일 미영 양국이 겐트 평화조약에 서명하였지만 이 소식이 도착하지 않아 두 장군은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12월 25일 잭슨은 함포사격으로 24시간 영국진영을 교란시켰다. 퍼켄햄은 9척의 영군함대로 미 해군 캐롤리나함을 격침시켰으나 루이지애나함은 프랑스 해적단에 의해 구조되었다. 잭슨은 두 척의 함대에 장착되었던 포를 미군진영에 옮겼다.


12월 28일부터 3일전 기습공격으로 시간을 얻은 잭슨은 3일안에 뉴 오얼린스에서 동남쪽으로 8 KM 떨어진 샬메트지역에 서쪽으로는 미시시피 강둑으로 영군을 수비하고 강둑에서 동쪽 늪 지역까지 1 KM 넘는 뉴 오얼린스 입구를 진흙과 나무로 엮은 높은 토담을 쌓아 올려 수비벽을 만들고 영군을 기다렸다.


이 수비벽은 잭슨 라인으로 알려졌고 젖은 진흙은 떨어지는 포탄을 박히게 만들어 가공할 만한 영군의 포병력을 무력화하는 방어준비를 하였다.


1815년 1월 1일 퍼켄햄의 포병대는 아침식사 중이던 잭슨의 지휘소건물을 파괴했으나 살아남은 잭슨은 즉각 반격명령을 내렸다. 영군의 가공할 만한 포탄은 토담에 박히는 반면에 미군의 32인치, 24인치 박격포탄은 광야에 노출된 영군 대포 15문을 고철덩어리로 만들어 퍼켄햄은 작전상 후퇴명령을 내렸다.


1월 8일 퍼켄햄은 영군 우측 진격에 4천명의 군사를 이끄는 깁스 소장을 선봉장, 램버트 소장을 예비 선봉장으로 미군 왼쪽진영을 공격하여 미군의 포를 포획한 후 포문을 미군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건 준장은 미군수비대의 간격을 넓혀 영 육군과 해병은 쉽게 진격하여 미군의 포부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잭슨의 명령으로 미 포병대는 포에 대못을 박아 영군이 노획한 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램버트는 깁스소장과 손튼준장이 부상 당한 후 광야에 노출된 동부 영군이 미군공격에 밀리자 영군에게 퇴각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새벽 어둠을 타고 미군 왼쪽 진영을 공격하던 영군은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광야에 노출된 영 포병대가 미군의 포격에 박살이 났다. 인해전술로 미군의 보루 몇 개를 점령했으나 포병지원이 없고 미군의 산탄 포격에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킨 소장도 부상을 입었다.


미군의 맹렬한 공격과 산탄 포는 퍼켄햄을 낙마 시켰고 부상을 입은 퍼켄햄은 말을 갈아타고 지휘를 하다 계속 퍼붓는 산탄 포에 장렬한 전사를 했다. 이 전투는 30분 전투로 알려졌고 미 전투역사에 길이 보존되고 있다.


램버트는 영군의 퇴각명령을 내리고 후퇴를 단행했다. 이 전투로 영군은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을 포함 291명의 전사자를 내어 총 2087명의 희생자를 초래했고 미군은 13명의 전사자를 포함 총 71명의 희생자를 내어 영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1월 19일 해군함대로 돌아온 램버트는 참모회의를 열고 작전계획을 세웠으나 잭슨의 용맹과 치밀한 작전에 속수무책이었다.


2월 12일 미영 간에 겐트 평화조약이 실효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군은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영 서인도제도로 항해하여 뉴 오얼린스 전투를 종식했다.


세계최강의 영군이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미군의 거의 2배 되는 노련한 군사를 이끌고 이 전투에 패배한 이유 중 하나는 남의 소문만 듣고 적을 우습게 본 퍼켄햄 장군의 경적필패로 인한 실수라 할 수 있다. 남의 부정적인 소문을 듣고 퍼트리는 사람은 실패를 부를 수 있다는 교훈이다.


반면에 신념과 사실판단에 능숙한 잭슨은 미 역사에 워싱턴 다음가는 제 2 미 독립전쟁의 영웅이 되었다. 샬메트 전투장은 뉴 오얼린스의 관광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