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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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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3)-잔 쿠인지 애덤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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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임직(1825-1829)

잔 쿠인지는 1825년 3월 4일 취임식에서 무릎까지 닿는 당꼬바지 대신 발목까지 긴 홈스방 바지에 가발 없이 성경대신 미 헌법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여 역대대통령의 취임식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취임식에서 그는 탕평책을 중시하였고 잭슨을 국방장관직에 제안했지만 잭슨의 사양으로 제임스 바버를 국방장관에,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러쉬를 재무장관에 임명하고 해밀턴의 미국체계(American System)를 고수했다.

미국체계는 미 남부의 농산물로 북부의 공업을 일으키고 수입관세에 의한 무역보호정책으로 미 산업을 보호하고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국채를 발행하고 경제성장에 의한 세입으로 국채를 갚는 정책이다.

잔 쿠인지는 국채를 이용하여 미국체계를 뒷받침하는 동서남북을 잇는 인프라정책을 세웠다. 이 체계는 21세기 현재까지 미국의 세계패권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초기 미 역대 대통령 중 흑인 노예를 소유하지 않은 대통령은 애덤스 부자 대통령뿐이었다. 따라서 부친과 같이 잔 쿠인지도 그의 정책은 남부 정치인들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는 초당정책을 주장했지만 미 남부의 잭슨이 민주당을 창당하여 잔 쿠인지 정책을 반대했다.

 

국내정책

이어리호수 운하(1825)

뉴욕에서 이어리호수까지 582Km의 거리를 연결하는 운하사업은 1817년 착공하여 잔 쿠인지의 인프라 사업의 첫 케이스로 1825년 10월 26일 완공되어 미 서부 개척 및 물류 공급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잔 쿠인지는 미국의 남북과 동서를 잇는 인프라 정책을 의회에 올렸지만 연방정부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 잭슨과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계속 좌절되었다.

 

원주민 정책(1826)

잔 쿠인지는 원주민들의 동화정책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백인 정착인들의 끊임없는 원주민 토지 착취는 동화정책보다 투쟁으로 이어졌다. 잔 쿠인지는 조오지아주의 머스커기 원주민들의 완전퇴거를 반대하는 연방정책에 서명하였다. 곧 조오지아주 반발로 연방 정부군과 조오지아주 민병들과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다행히 머스코기 부족의 양보로 내전 없이 해결 되었지만 잔 쿠인지의 인디안 보호정책은 미 남부와 서부의 계속적인 혐오감을 일으켰다.

 

1828년 관세도입

잔 쿠인지는 내수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1828년 관세법을 시행하여 특히 서부개척 산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대를 일삼는 남부정치인들은 관세법 반대를 정치 도구로 이용하였다.

 

국제정책

잔 쿠인지는 재임시 덴마크,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북부유럽제국과 무역을 활성화 하였고 중남미 제국 하와이, 타히티와 교역을 하여 무역경제를 일으켰다. 영국의 무역 우선대우를 파기하여 영국령 서인도 제도와 무역협정을 이루지 못했지만 미국의 무역경제는 계속 성장하였다.

텍사스, 멕시코 구입을 성공시키지 못했지만 간접적인 영국과 남미간의 무역제재에 성공하여 영국의 북미 재침략을 방지하는 공을 세웠다.

 

1828년 대선

1828년 12월 2일 미 대선은 금수저와 흙수저, 철학적 이론과 실전경험, 원주민 보호정책과 원주민 추방정책, 흑인노예 무소유자와 소유자, 강직성과 유통성, 엘리트 정신과 카리스마, 당시 최고의 외교관과 최고의 장군으로 구분되는 잔 쿠인지와 잭슨의 대결이었다.

남부인들의 의지를 알면서도 미국의 발전을 위해 미국 체계를 고수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선거공약으로 잔 쿠인지는 대선 재선에서 261의 선거인단 중 83표를 받아 노예 제도의 남부를 중심으로 178표를 받고 50.3%의 지지를 받은 잭슨에게 대패하였다. 1선 대통령 임직에서 물러나는 잔 쿠인지는 부친 애덤스와 마찬가지로 차임 대통령 취임식에 불참하였다.

 

하원의원 임직(1831-1848)과 노예해방운동

1828년 재선에 패한 잔 쿠인지는 2년 후 미 하원의원에 출마하여 1848년까지 8차에 걸쳐 하원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영구 하원직을 맡고 정치를 계속하였다. 임기 중 그는 밴 뷰렌, 해리슨, 타일러와 함께 미국체계를 당의 정책으로 하는 위그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임기 중 노예해방운동을 하원에 계속 상정시켰고 텍사스공화국의 미국 합병은 남부의 노예제도를 번창시킨다고 반대했다. 멕시코전쟁도 노예제도 번창을 이유로 반대했다. 역사는 그를 노예해방운동의 선구자로 기록한다.

 

사망(1848)

1846년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던 잔 쿠인지가 1846년 2월 하원에 출석하여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는 1848년 2월 21일 하원에서 멕시코 전쟁의 영웅전사들 명예훈장을 반대한다는 연설 중 뇌출혈로 쓰러져 이틀 후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하원에서 잔 쿠인지의 노예해방운동을 지켜보던 에이브레햄 링컨 하원의원이 참관했다.

그의 시신은 메서추세츠주 쿠인지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허약한 체질에도 52년간 남편의 정치활동을 도우며 4자녀를 키운 미망인 루이자는 남편 사망 후 4년을 워싱턴에서 거주하다 1852년 5월 15일 77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가족묘지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 미 의회는 최초로 루이자 영부인 장례식에 묵념의 예우를 갖추었다.

미 조폐공사는 역대 영부인을 기념하는 금화 시리즈로 2008년 5월 29일 0.5온즈 10달러짜리 루이자 애덤스 금화를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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