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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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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25)-1812년 전쟁 전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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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겐트 평화조약을 위한 전략

나폴레온 전쟁 중 프랑스와 미국의 무역을 금지하기 위해 영국이 미국의 상선을 계속 나포했기 때문에 미국의 선전포고로 1812년 전쟁이 일어났으나 1814년 4월 나폴레온 전쟁이 끝남으로 양국은 전쟁 명분이 없어졌다.

따라서 양국은 1814년 8월부터 벨지움 겐트에서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을 유리한 조건으로 이끌기 위해 웰링턴 장군은 1814년 9월까지 나폴레온 전쟁에 전투경험이 풍부한 3만 명의 군대를 캐나다에 파병했고 헨리 베서스트 영 국방장관은 조오지 프레이보스트 캐나다 총독에게 1814년 내에 미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프레이보스트는 몬트리얼에서 세인트 로렌스강을 따라 북동쪽 90KM 떨어진 소럴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리셜루강을 따라 170KM 떨어진 뉴욕주의 샴플레인 호수 서쪽에 플래츠버그를 함락시키는 작전을 세웠다. 몬트리얼에서 플라츠버그까지 육로로 101Km가 된다. 샴플레인 호수를 장악하여 캐나다에서 강을 따라 뉴욕시까지 침투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양군 육군병력

프레이보스트는 11,000명에서 선발된 9,000여명의 영 정예군과 퀘벡 정예군을 육로를 통해 진군하게 하였다. 이에 맞서 암스트롱 미 국방장관은 알랙샌더 매컴 준장을 플라츠버그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매컴은 주의용군 2,900명을 포함한 6,354명의 미 군대를 플래츠버그로 소집하여 수비진영을 구축하였다.

 

양군 해군병력

36세의 조오지 다우니 영 해군 대위는 1,200톤 콘피안스함을 포함한 16척 총 2,402톤의 영국함대를 이끌고 삼플레인 호수로 진입하였다.

28세의 토마스 맥다노 미 해군 대위는 734톤의 새라토가함을 포함한 14척 총 2,264톤의 미국 함대로 플라츠버그를 수비하였다.

 

플라츠버그 전투, 샴플레인 해전(1814년 8월 31일~9월 11일)

 

8월31일

프레이보우스트 영군 9,000명은 뉴욕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매콤의 1,260명 미군은 포를 이용한 소접전을 벌이며 영군 진로에 방어책을 구축하며 퇴각하였다.

9월 6일

영 대군은 힘들이지 않고 방어책을 제거하며 플라츠버그에 도착했다.

9월 7일

영군은 플라츠버그 요새 공격을 위해 새라낙 도강을 시도했으나 지역 지리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미군의 산발적인 공격에 당황하여 도강을 포기하고 포병부대 진지 구축을 시도했다.

9월 9일

미군은 불덩어리포로 영군의 포공병부대를 불사르고 50명의 미 특공대는 영군이 자랑하는 로켓포 부대를 궤멸시켜버려 영군은 안전지역으로 퇴각하였다. 유럽 실전경험이 많은 영군은 얕은 강변을 따라 도강을 했지만 프리보우스트의 명령으로 영 해군의 함포사격 지원을 기다려야 했다.

맥다노는 영해군의 장거리포를 피해 화력이 강한 단거리포를 장착한 대형함대 4척을 플라츠만 남북으로 세우고 그 사이를 소형전투함 10척이 정박하게 하였다. 모든 군함은 용수철 달린 닻줄로 선미와 선두에 연결된 닻을 내려 짧은 시간에 전투함이 90도나 180도 선회할 수 있게 만들었다. 새라토가함은 360도 회전이 가능하게 정박을 하고 영 해군함대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9월 11일

7시 40분 영 해군은 미 함대를 접근하여 9시 45분 콘피안스함의 다우니는 새라토가함에 함포사격을 가하여 미 해군의 5분의 1이 산화하고 맥다노는 부상을 입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맥다노는 파손된 새라토가함을 오른쪽으로 90도 바꾸어 측면에서 파괴력이 좋은 단거리포로 콘피안스함을 파손시켰고, 배의 흔들림으로 벗어난 포에 다우니함대 사령관이 압사당했다.

미풍으로 영 함대는 항해는 물론 방향을 바꾸지 못해 좌우자재로 방향을 틀어 측면에서 함포사격 할 수 있는 미 함대에 영 함대는 차례로 항복을 해야 했다. 다우니 외에도 많은 영 해군장교가 사망이나 부상을 당해 결국 영 해군 장교들은 3시간내의 맹렬한 함포 사격 끝에 모두 항복하고 새라토가함에 올라와 검을 내려놓고 항복식을 거행했다.

28세의 맥다노는 “당신만큼 소중한 검을 칼집에 넣으시요”라고 말하고 양군부상병들을 미군 병원에 치료를 받게 하여 그의 전투능력과 신사도의 명성을 떨쳤다.

프리보우스트와 매컴은 육지에서 해전을 관망하고 있었다.

전령으로부터 다우니의 영 함대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확인 받은 프리보우스트는 영군의 퇴각명령을 내리고 캐나다로 후퇴했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영국 장성들은 단시간 내에 플라츠버그를 함락시킬 수 있다고 항의를 했으나 퇴각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로 미군은 104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220명의 희생자를 영군은 168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939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프리보우스트는 영국으로 소환되어 군사재판을 받게 되었지만 그가 전투를 감행하여 플라츠버그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샴플레인호의 영 해군몰락으로 군수품보급이 불가능하여 요새를 수비할 수가 없기 때문에 후퇴했다고 자신을 변호하여 형을 받지 않았다. 웰링턴 장군도 프리보우스트의 전략이 옳았다고 변호했다.

플라츠버그 전투로 미국은 겐트평화조약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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