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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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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14)-1812년 전쟁 전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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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1812년 미-영간의 전쟁에 미국에게 땅을 뺏기는 테컴서샤니족을 비롯한 원주민 연합이 영국군과 연합군이 되었다. 한편 이로코와원주민 연합의 일부는 미국과 연합이 되었다. 플로리다를 차지한 멕시코도 미국과 우호적인 크리원주민 연합에서 이탈한 레드 스틱스족을 앞세워 미국의 플로리다서부를 지키기 위하여 영국과 연합군이 되었다.

자유를 찾아 캐나다에 이주한 흑인들은 캐나다 영국군이 되어 미군과 전투를 벌였다. 지역적으로 1812전쟁은 5대호를 중심으로 차지한 캐나다와 미 서부와 대서양연변과 플로리다 서부와 뉴오얼린스로 나누어진다.

1812년 6월18일 미국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기 전 6월 11일 취임한 리버풀영주 라버트 밴크 젠킨슨 영국수상은 6월 23일 양국간의 분쟁관계를 개선하는 정책을 영국의회에 상정했다. 그 당시 미국과 대륙간 소식전달은 3주가 걸렸다. 따라서 미국은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전쟁은 양국통치자들이 재고할 수 있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을 통솔하는 장군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캐나다 침공(1812년 7월 12일–10월 13일)

영국의 선박건조에 필요한 목재와 식량 등을 생산하는 캐나다를 접수하기 위해 미국은 5대 호수를 차지하는 온타리오주와 퀘벡주를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1812년 7월 12일 매디슨의 특명을 받은 윌리엄 헐 준장은 의병대 7천명을 이끌고 디트로이트를 거처 현재 윈저로 알려진 샌드위치를 통해 현 온타리오주인 상위캐나다를 침공하였다.

영국은 나폴레온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캐나다 온타리오주에는 영국 정규군 1600명밖에 없었다. 의기양양한 헐은 ‘캐나다는 영국의 탄압에 굴복하지 말고 미국에 병합하라. 원주민과 연합하는 영국군은 죽음을 각오하라’를 외쳤다.

그러나 현실은 영국군을 공격할 대포도 없었고 보급과 통신이 원만치 않아 일단 디트로이트로 후퇴를 해야 했다. 그리고 훈련이 되지 않은 의병대를 이끄는 헐은 미 독립전쟁을 통해 참전경험을 가졌지만 겁이 많았다.

반면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담력이 센 아이삭 브록 중장은 영국 정규군을 보완하는 캐나다의병대를 소집하고 8월초 엠허스트에서 샤니족의 테컴서와 만나 테컴서가 필요한 무기를 제공하고 연합을 맺었다. 8월 7일 미군의 보급을 맡던 밴 혼이 이끄는 200명의 미군은 원한에 찬 샤니족의 테컴서 공격으로 반 이상이 학살당했다.

8월 15일 헐은 시카고 요새를 지키는 미군을 포트웨인으로 후퇴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는 148명의 미군과 가족들 중 86명은 포와타미족의 전사들에게 무참한 학살을 당했다. 브록은 영국의 정예병이 미군을 퇴치시킬 수 있다고 선언하여 캐나다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온타리오 남서에 위치한 앰허스트 요새에 진지를 옮기고 테컴서 전사들과 연합해 디트로이트를 공격하였다.

겁에 질린 헐은 영국군과 테컴서 군의 숫자가 미군보다 압도적이고 테컴서의 샤니족은 미군을 대량학살 시킬 것이라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8월 16일 브록에게 항복하였다. 사실 헐의 군대는 1,300여명 정도되는 브록과 테컴서군대의 2배에 가까웠다. 치욕적인 패배로 미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후에 헐은 미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매디슨에 의해 사면을 받았다.

동년 10월13일 스티븐 밴 렌슬레어 소장은 의병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3,550명의 미군을 이끌고 루이스턴에 집결하여 나이아가라 강을 건너 캐나다 쿠인스턴을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브록은 1,300명의 영 연합군을 지휘하였다. 렌슬레어는 큰 배 대신 작은 배로 도강작전을 하여 쿠인스턴 고지를 점차적으로 차지하는 중 위기를 느낀 브록은 고지탈환을 위한 공격을 하다 총탄에 쓰러졌다.

치열해진 전투는 테컴서가 이끄는 전사들의 게릴라전으로 미군은 혼비백산이 되어 갈팡질팡 하던 중 도강한 미군 500명은 항복을 하였다. 이 전투는 쿠인스턴하이츠전투로 알려졌고 43세의 나이로 전사한 브록의 동상을 쿠인스턴에서 볼수있다.

캐나다는 브록을 캐나다인으로 추대하고 디트로이트를 공격한 그의 업적과 함께 캐나다의 방위력을 역사에서 찬양하고 있다. 일부는 테컴서도 캐나다인으로 추대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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