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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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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7)-미 독립전쟁 전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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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미군 사망자 7명에 영군 사망자 5명으로 전투 없이 후퇴로 끝난 티콘도로가 요새의 함락은 미 전투사상 최악의 무능력 지휘관 기록으로 남았다. 싱클레어와 스카일러는 1778년 9월 군법에 회부되었지만 무죄판결을 받고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상원은 게이츠 사령관을 스카일러와 교체하였다. 이 전투승리 소식을 접한 조오지 3세는 미 독립전쟁이 끝난 것처럼 영국의회를 환호하게 만들었다. 버고인은 7월 7일 티콘도로가의 남동쪽 33 km의 해버튼을 7월 8일에 남남서쪽 58 km에 위치한 앤 요새를 계속 함락시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스탠윅스 요새방어전(1777년 8월 2-22일)

나이아가라 폭포 서쪽 350 km에 차지한 스탠윅스 요새는 남동쪽에 위치한 알바니아와 175 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알바니아로 가는 길목을 차지한 스탠윅스 요새는 한때 스카일러 요새라고 알려졌다.

8월 2일 영군의 작전계획대로 알바니아를 협공하기 위해 센 러제이 영국 준장은 750명의 영국 정규군 및 캐나다 민병과 800여명의 인디언을 포함하여 총 1550여명의 군을 이끌고 8월 2일 스탠윅스 요새를 포위하였다.

스텐윅스 요새는 피터 겐서보트 대령이 2500여명의 민병으로 수비하고 있었다. 6일 포위망을 뚫기 위해 니콜라스 허치하이며 준장이 800여명의 뉴욕민병대를 이끌고 진군 도중 오리스캐니에서 샌 러제이 복병을 만나 전투를 지휘하다 총격을 맞고 전사했다.

이 기회를 타고 요새 수비병이 왕당파와 영군을 돕는 허술한 인디언 진영을 습격하여 인디언 잔병들을 사살하여 인디언들은 전의가 떨어졌고 희생을 감수하며 싸울 수 없다고 영군을 떠나기 시작했다.

한편 스카일러의 지시를 받은 아놀드는 20일 8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데이튼 요새까지 진군하였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엄청난 숫자의 민병들이 각 주에서 스탠윅스 요새로 진군한다는 헛소문을 적군에 퍼트려 이에 겁을 먹은 센 러제이는 22일 요새공격을 포기하고 캐나다로 후퇴했다.

 

베닝턴 전투(1777년 8월 16일)

1777년 8월 9일 승승장구하는 영군에 소속된 독일용병 바암 중령은 800여명의 군을 이끌고 알바니아 북동쪽으로 60 km 떨어진 버만트주 베닝턴을 향해 진군 하고 있었다. 버고인은 잔 스타크 소장이 민병 2천여 명을 베닝턴에 잠복시킨 정보를 얻지 못했다.

바암은 11일 계속 진군하여 베닝턴 근처까지 도착하였다. 14일 스타크의 소수 선발대가 독일 용병을 공격한 후 후퇴로 유인하였고 위험을 느낀 바암은 버고인에게 증병요청을 하여 버고인은 브라이맨 중령이 이끄는 독일용병 500명을 추가 파병했다.

16일 오후 3시 베닝턴 북동쪽으로 16km떨어진 뉴욕주 울룸새크에서 휴식을 취한 스타크 군은 미군을 추격하느라 흐트러진 바암군을 사방팔방에서 게릴라식 공격을 하여 혼란에 빠진 독일 용병은 군복을 입지 않은 미 독립의용군과 왕당파의용군을 구분 못하고 헛총질을 하여 왕당파와 영군 소속 인디언들은 도주에 바빴고 바암 중령은 총격을 맞고 쓰러졌다.

완전한 포위로 항복한 영군은 207명이 사망했고, 700명이 포로가 되었다. 포를 비롯한 무기와 탄약 등을 회수한 후 700명의 포로는 보스턴으로 후송되었다. 미군은 30명의 사망과 40명의 부상병을 기록하여 버고인과의 전투에서 첫 번째 쾌거를 올렸다.

퇴각해오는 브라이맨 중령에게서 소식을 접한 버고인은 베닝턴 전투 패배로 1000여명의 군사를 잃고 캐나다발 센 러제이와 뉴욕의 클린턴 협공 병력이 알바니아로 도착하는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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