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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6)-미 독립전쟁 전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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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영국군 축출 목적으로 시작된 미국의 캐나다 침략은 미군의 후퇴로 영국군은 미국을 역공격하여 전장을 미국 버몬트주와 뉴욕주로 옮기며 미 독립전쟁의 북부지역 전투의 역사를 만들었다.

 

잔 버고인 캐나다 총사령관

1776년 6월 칼튼의 지휘하에 캐나다를 침공한 미군을 후퇴시킨 버고인은 영국으로 돌아와 칼튼의 소극적인 전략으로 미군을 격파시킬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놓쳤다고 의회에 보고하여 영국 왕 조오지 3세와 의회는 칼튼 대신 버고인을 미국남침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온타리오주의 센 러제이 영국군과 뉴욕주의 클린턴과 하우의 영국군과 협공하여 뉴욕주 알바니아를 함락시키는 전략의 승인을 받고 캐나다로 돌아왔다.

 

티콘도로가 요새 함락(1777년 7월 6일)

몬트리얼 정남쪽으로 212 KM 떨어진 티콘도로가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버고인은 영 정규군, 독일 용병. 캐나다 민병과 이로코이 인디안 전사 총 8천에서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영국군을 통솔하여 미국남침을 시작했다.  

사령관에서 밀려나간 칼튼은 몬트리얼을 고수하며 버고인에게 행운을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1777년 3월 미 상원은 티콘도로가 요새 사령관 호레이쇼 게이츠를 미 북부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가 필립 스카일러 전 총사령관의 강력한 반발로 스카일러를 총사령관으로 재임명하는 과오를 저질러 게이츠는 티콘도로가 사령관 직을 사임하고 필라델피아로 돌아왔다.

스카일러는 티콘도로가 요새를 지키는 3천 내지 5천명의 군 지휘를 5월 아써 싱클레어 소장에게 맡기고, 6월 20일 작전회의에서 미군 요새 수비병이 버고인의 군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패전감으로 후퇴작전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이 영국군의 행군을 저지하는 작전임무가 끝날 때까지 싱클레어에게 요새방어를 부탁했다.

7월 2일 티콘도로가 요새에 근접한 버고인은 지역적으로 높은 슈가 로우프고지를 이르는 길목의 마운트 인디펜던스 요새를 버리고 후퇴한 싱클레어 덕분으로 쉽게 고지를 점령하고 포병부대를 이동하여 며칠간 티콘드로가 요새를 초토화 시킬 수 있는 거포를 장착해 놓았다.

7월4일 독립선언 1주년을 경축하는 조촐한 행사를 마치는 저녁 싱클레어는 슈가로우프 고지에서 영국군소속 인디안 전사가 실수로 지핀 불빛을 보고 겁에 질려 다음날 5일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소형나룻배 200척에 군사들 몸만 빠져 나오다시피 모든 보급품 식량은 물론 총기 수천 개와 화약 대포를 버리고 교각과 보급품을 태우지도 않고 줄행랑을 쳤다. 배를 못 탄 병정들은 육로로 각자가 알아서 남쪽으로 향해야 했다.

6일 버고인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남침을 가로 막는 티콘드로가 요새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요새함락으로 인해 미군은 후퇴를 계속하며 스카일러의 지휘로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에 베어낸 거목으로 장애물을 만들어 그나마 버고인의 행군을 지체하게 만들었다.

 

제인 메크리 학살

1777년 7월 27일 남침을 계속하던 영군의 선두에서 미 민병가족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와이앤다트족 인디안전사 팬써는 18살 제인 메크리의 두피를 차고 버고인 진영에 나타났다. 제인 메크리는 왕당파가족이었고 데이빗 존스 왕당파장교 약혼녀로 미 정착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금발의 미녀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버고인은 와이엔다트 추장의 영군이탈을 우려하여 훈방으로 마무리했다. 이 소식은 미 전역뿐만 아니라 영국 유럽까지 퍼져 미 정착인들의 울분을 일으켰고 수천 명의 의용군들이 총을 들고 노도와 같이 모여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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