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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18)-잔 애덤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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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손들이 수학과 철학을 배울수 있게, 우리는 전쟁정치와 전략을 배워야 한다. (잔 애덤스)

 

▲잔 애덤스

 

잔 애덤스는 변호사, 미 연합 상원의원. 유럽외교 등의 정치 활동을 배경으로 미 부통령, 미 대통령직을 지냈지만 정치가라기보다는 정치철학가로 알려져 있다.

 

공정한 변호와 워싱턴총사령관 임명

잔은 1735년 10월 30일 매서츄세츠주 브레인츄리에서 청교도후예인 아버지 잔과 어머니 수잔의 장남으로 태어나 1755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했다. 3년 후 보스톤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하며 1764년 애비게일 스미스와 결혼했다.

1765년 영국의 인지세에 식민지 정착인들의 반발이 일자 영국은1767년 타운센드법으로 바꾸어 생필품의 수입세를 부과하였다. 애덤스는 정착인들을 위한 애국심을 일으켜 영국식민지정책 반대운동에 나섰다.

1770년 3월 5일 보스턴에서 영국보초병6명에게 돌과 얼음 등을 던지는 250여명의 성난 정착인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5명 사살과 6명 중경상을 입힌 영국보초병들은 보스턴 학살 재판을 받아야 했다.

정착인들의 빗발치는 반발을 무릅쓰고 애덤스는 체포된 영국군인들을 변호하여 현장에 없었던 지휘관과 5명의 군인들이 무죄판결을 받게 했고, 발포한 2명의 영국군은 정당방위 살인죄로 감형을 받게했다.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변호는 적대국관계와 무관하다는 판단으로 해결된 이 사건은 현재까지 미국의 공정한 사법재판과정의 귀감이 되었다.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사실을 판단해야 한다는 이성을 후세에 알린 것이다.

1774년 애덤스는 미 연합상원의 매서츄세츠주 대표가 되었고, 1775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 연합상원회에서 조오지 워싱턴을 미 독립전쟁 총사령관으로 지명 추천하여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자신은 미 연합상원을 통해 독립군의 전쟁물량을 공급하는 독립정치에 몰두했다.

 

미 독립선언서

13개 주 대표자들 중 잔 애덤스,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라저 셔먼, 라버트 리빙스턴은 1776년 6월부터 미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여7월 4일 최종 선언서로 채택하고 미 연합상원에서 56명의 지역대표들이 서명하게 하였다. 미 독립선언서 공포를 주장한 애덤스는 본문 머리말을 쓰고 제퍼슨을 지명 선출하여 미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유럽외교활동

1777년 가을 미 연합상원의 요청에 의해 애덤스는 프랑스와 동맹외교를 추진 중인 벤자민 프랭클린 보좌관직을 수락했다. 부인 애비게일은 고향에서 가족을 돌보고 애덤스는 후에 미 6대 대통령이 된 10살 난 장남 잔 쿠인시와 함께 1778년 2월 보스턴함을 타고 보스턴 항구를 떠나 풍랑과 영국함대들과 충돌을 피하며 4월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프랭클린은 이미 미국과 프랑스와의 동맹을 마감한 상태였다. 사교하고 거리가 먼 대쪽 같은 성격에 직설적인 애덤스는 프랭클린의 상류사회 부인들과 파티를 즐기며 호화스러운 유흥위주의 외교활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을 터트렸다.  

미 연합상원이 프랭클린을 전권특사로 임명하고 애덤스의 직책을 부여하지 않자 애덤스는 아들과 함께 1779년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1월 장남과 9살 난 차남 찰스와 함께 스페인을 통해 파리에 도착하였다. 그는 프랭클린을 도와 찰스 버지언스 프랑스 외부장관에게 직설적으로 프랑스의 원군을 재촉하였다.

버지언스가 미 연합상원 애덤스와 회담을 할 수 없다고 불평하자, 1780년 애덤스는 네덜란드로 떠났다. 네덜란드 각료를 만나려고 했지만 영국의 눈치를 보는 네덜란드 정부는 애덤스의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애덤스는 스트레스 병으로 몸져눕기까지 했다. 1781년 11월 워싱턴 미 독립연합군의 승리가 알려지자 네덜란드정부는 애덤스를 미 연합국 대사로 인정하고 회담 끝에 교역과 5백만 길더의 차관을 약속했다.

끈질긴 애국심으로 열매를 맺은 애덤스는 1783년 파리조약회담에 참가했다. 버지언스의 눈에 벗어난 애덤스는 잔 제이와 함께 프랑스와 무관하게 영국과 교역을 하는 조건으로 영국에게 미국 독립을 요구했다. 미국과 프랑스의 연합을 방지하기 위해 영국은 애덤스의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허락 없이 영국과 협약한 사실을 알아내고 화가 난 버지언스는 영국과 미국의 연합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재치 있는 프랭클린의 설득으로 1783년 9월3일 미국의 자주독립을 인정하는 파리조약에 영국과 함께 서약하였다.

애덤스는 1785년부터 1788년까지 영국주재 미 초대 대사에 임명되어 부인 애비게일과 함께 런던에 거주했다. 그는 제이 미 외무부장관을 대동하고 조오지 3세 영국왕과 양국이 전후 해결해야 될 많은 문제를 논의했다.

대영제국 정치인들이 갖은 패전의 쓰라림을 달래야 하는 어려움이 컸고, 때에 따라서 일부 영국강경파들의 신체적 위협을 피해 애덤스는 부인과 숨어 다니기도 하며 양국간 전쟁 없는 외교관계를 이룩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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