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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14)-알렉산더 해밀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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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해밀턴은 숭고하고 예리한 지력을 가진 미합중국의 가장 훌륭한 정치가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26대 대통령)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2004년 론 처노가 쓴 알레산더 해밀턴의 전기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로 선정된 후 이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은 린 마뉴엘 머란다 음악(작곡, 작사) 및 연극(성우) 극작가는 장기간에 걸쳐 준비한 끝에 2015년 해밀턴 아메리칸 뮤지컬을 미 브로드웨이에 선보인 후 미 전역 및 유럽의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뉴질랜드, 캐나다까지 흥행에 성공했다.


뮤지컬이 힙합을 포함한 쏘울, 재즈, 팝, 블루스 및 재래식 뮤직으로 표현되어 젊은 층을 비롯하여 모든 연령층의 인기를 끌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알렉산더 해밀턴을 비롯하여 미합중국의 건국국부들의 업적을 상기시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해밀턴 뮤지컬은 토니상, 그래미상, 로렌스 올리버상, 오비상과 퓰리처 드라마상을 받았다.

 

개천에서 나온 용

해밀턴은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 중 유일한 이민자로 가장 작은 영연방 섬나라에서 비천하게 태어나서 20세기 이후 미국이 세계 패권국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만든 위대한 정치가다.

 

가난한 고아의 유태인 교육

해밀턴은 출생연도가 1755년이나 175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캐러비안 네비스섬에서 모친 레이철 퍼셋트 래비언과 스카틀랜드에서 온 떠돌이 무역상 제임스 해밀턴 사이에서 태어났다.

 

해밀턴의 생부모들은 다른 배우자들과 결혼한 상태였다. 1766년 생부는 가족을 버리고 떠난 후 생모는 혼자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쎈쿠아로 이사하였다. 가게 헬퍼로 일하던 생모가 1768년 황열병으로 세상을 떠나 해밀턴은 동생 제임스 주니어와 함께 11세 고아가 되어 사촌 집에서 기거하며 무역상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일할 수 있는 나이 13세에 맞추기 위해 생년월일을 바꾸었다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주장한다. 1769년 사촌 피터 리튼이 자살하여 해밀턴 형제는 각각 헤어져야 했다. 동생은 목수 수련생으로 떠났고 해밀턴은 토마스 스티븐스 상인집으로 입양되었다.

 

해밀턴은 무역업을 빨리 배워 14세 되던 해 주인이 해외출장 중에도 사업을 번창시켰고, 틈틈이 가보로 내려오는 34권의 책을 읽어 투철한 문장실력을 키워나갔다.

 

영국교회는 불법으로 태어난 해밀턴 형제를 교회학교에 입학시킬 수 없다고 하여 유태인 교민의 개인학습을 받았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해밀턴의 모계가 유태인 혈통과 연결되었다고 주장한다.

 

어쨌던 해밀턴은 돈 계산은 물론 돈을 이해하는 유태인의 DNA를 갖고 있었다. 해외유학을 꿈꾸고 있던 그는 1772년 생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크리스찬스테드타운에 닥친 허리케인의 참상을 가슴 깊이 새기게 하는 강력하고 섬세한 내용으로 이 참상은 인간의 허영심과 자만심을 버리게 일깨어 주는 신의 효시라고 끝을 맺었다. 이 글이 세상에 알려지자 고용주와 섬의 유지들은 해밀턴을 미 신대륙에 유학보내기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

 

킹스칼리지 입학

1772년 해밀턴은 보스턴항구를 경유 뉴욕시에 도착하여 무역상의 아들인 허큘리스 멀리건 집에 거처를 정하고, 수화물 선적을 하여 생활비 및 교육비를 조달했다.

 

1773년 뉴저지 엘리자베스타운에서 대학입학 준비과정을 거치며 킹스칼리지 (현 컬럼비아대)에 수강생으로 입학했다가 1774년 5월 정규학생이 되어 영국지배를 반대하는 라버트 트룹 평생친구를 사귀었다. 동년 6월 해밀턴은 트룹과 함께 4명의 학급생 문학클럽을 만들어 후에 컬럼비아대의 유명한 논쟁모임인 필로렉시안 소사이어티의 발판을 만들었다.

 

같은 해에 영국교회의 세뮤엘 씨버리 성직자가 왕당파를 지지하라는 팜플렛을 배부할 때 해밀턴은 작가미상으로 두 편의 식민지 상원제도를 옹호 지지하는 글을 펴냈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독립운동이 무르익어가는 1775년에는 보스턴을 비롯해 북쪽지역에서 반영제국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해밀턴은 직접 폭동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독립운동 움직임에 계속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인관계를 중요시하는 해밀턴은 왕당파인 킹스칼리지 마일스 쿠퍼학장을 폭도들로부터 구해냈다.

 

동년 독립전쟁에 의한 폐교로 독립군에 입대한 해밀턴은 전후 1782년에 복교하여 주로 독습으로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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