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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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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돈 이야기(49)-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2)(The Founding Fathers of United States of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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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Men should not petition for Rights, but take them. (Thomas Paine)

 

건국국부들은 국가를 위한 정직한 위정자들의 자체통치, 국방력 강화,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를 위하는 애국심과 단결심, 자유와 방종 구분, 권력 남용방지, 개인 소유권에 의한 자본주의선택 그리고 중앙은행에 의한 국가재정확립 등을 원칙으로 후손들이 지속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건국의 반석을 쌓아 나가게 하였다. 


미 독립전쟁(1775-1783)


미 독립전쟁시 돈을 쫓는 유럽 제국들은 7년 전쟁 후에도 혈안이 되어 서로 전쟁을 끝이지 않았다. 미 식민지정책에 의한 약탈경제와 식민지인들의 서부개척을 금지하는 영국법은 미국독립전쟁을 야기하였고, 미국은 영국의 적대국인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을 우방국으로 끌어드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정책으로 군이 모자라는 영국은 독일의 용병을 사들여 독립군과 싸우게 하였다. 그 당시 미 식민지13주 약40%의 애국독립군은 영국군에 합세한 약 20% 영국왕당파 민병대와도 싸워야 했다. 원주민 인디언들도 독립군과 영국지지 파로 분리되었다. 


1722년


6월 9일 존 브라운을 선두로 소수의 식민지인들은 로드 아일랜드에서 한 우편선을 추적하다 조류에 밀린 영국 개스피 세관선을 불태우고 선장을 총격으로 중상을 입혀 개스피 사건을 일으켰다. 


1773년 


5월 10일 영국의회에 통과된 홍차세에 분노한 보스턴 시민들은 동인도 무역회사선박에 선적된 홍차를 바다에 던져 부당한 세법에 항거하였다. 


1774년


영국의회는 징벌법을 만들고 통치자를 보냈으나 애국시민들의 거센 반항에 본국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영국은 토마스 게이지 중장과 정규군 4연대를 보내 폭도로 변한 시민들을 제압하려 하였다.


1775년


4월 18일 게이지는 메사추세츠 콩코드의 민병대 무기를 압수하기 위해 700명의 군대를 파견 하였다. 폴 리비에는 이 소식을 민병대에 알려 다음날 잠복한 500명의 민병대에 섬멸을 겨우 모면하고 보스턴으로 후퇴하였다.


이 렉싱턴 콩코드전투는 미 독립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민병대는 보스턴 포위전을 폈으나 6월 17일 4500명의 영국 정규군을 이끈 윌리엄 하우 장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6월 19일 미 연합 상원은 조오지 워싱턴 장군을 13주 민병대의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1776년


1월 10일 미국 건국 국부 8인에 들어가는 토마스 페인은 13주 미 연합국이 즉각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사실은 13주 연합시민의 상식이 되어야 한다는 상식(Common Sense) 팜플렛을 발간하여 순식간에 50만 권이 팔렸다.


인구 250만 식민지 인구에 비하면 엄청난 호응을 받은 책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자는 애국민병대의 사기를 북돋아 주고 식민지 시민들의 단결심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편 워싱턴은 부족한 무기와 탄약을 영국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일부 보충하고 자체생산도 시도하였으나 90%는 프랑스로부터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3월 독립군이 영국군 요새에서 포획한 대포의 포문을 영국군에 향하자 하우는 보스턴을 버리고 캐나다 핼리팩스로 후퇴하였다. 


워싱턴은 뉴욕시를 향해 민병대 대부분을 이동시켰다. 미 연합회 결정으로 민병대는 여세를 몰아 캐나다 퀘벡주를 미국의 14주로 영입하려 했으나 강력한 캐나다 및 영국 정규군에 몰려 6월 트루아 리비에르 전투 패배로 캐나다침공을 포기하였다.


7월 4일 미 연합회가 독립선언을 공포하였고, 워싱턴은 뉴욕시에 이동한 민병대 2만 명에게 독립선언문을 읽어주어 사기를 고취시켰다.


8월 27일 2만2천명의 영국 정규군을 재정비하고 롱아일랜드에 도착한 하우는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민병대를 몰아내고 9월 15일 뉴욕을 점령하였다. 10월 28일 화이트 플레인스 전투를 벌였으나 워싱턴은 역부족으로 펜실바니아까지 후퇴하였다. 


월동준비로 영국군의 추격을 받지 않았지만 워싱턴의 민병은 고작 5천명밖에 안되고 연말에 복무계약이 끝나는 귀향군들을 제하면 1400명까지 줄게 되었다. 독립군에 종군하던 페인은 ‘지금이 독립군의 영혼을 시험할 때’라고 계몽하여 영국을 증오하는 개척인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현실은 재정난으로 헐벗고 공포에 떠는 처참한 패잔병들의 절망적인 패배감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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