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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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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돈 이야기(7)-금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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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e Spaniards know a sickness of the heart that only gold can cure. (Herman Cortes) 

 

 금을 돈으로 취급하면 저주를 받는다. 

 


 잉카제국의 발견


 1502년 신대륙을 다녀온 이후 피자로(Francisco Pizarro)는 1513년 태평양을 발견하게 되었다. 1524년부터 2년간 두 번의 항해를 통하여 멕시코 남쪽을 향해 남미 깊숙이 탐험하다가 1527년 처음으로 툼베즈에서 잉카 왕국을 접하게 되었다. 지칠 대로 지친 피자로 탐험대는 잉카 국민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풍요롭게 생활하는 잉카 국민들이 금으로 만든 토속 신앙제단을 비롯하여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릇이나 장신구에 금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관찰 하였다. 그 당시 잉카 왕국은 세계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로 노약자나 불구자들도 국가의 혜택을 받고 의식주를 해결하게 하였다.


 그들이 개발한 높은 산 경작법은 수로개발과 더불어 세계 유일한 농경사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지진에도 흔들리지 않게 세운 건축물들은 현 세기에 개발한 3D 프린터를 사용해야만 구조 시공이 가능한 신비성을 간직했고, 이 문명은 인류의 대표적인 자랑이라 할 수 있다.


 1528년 스페인으로 돌아온 피자로는 1년간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하여 잉카제국을 정벌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조건은 피자로가 세운 회사가 정벌과 약탈로 생기는 이익금의 10%를 스페인 왕국에 바치는 것이었다. 


 천연두 확산


 콜럼버스의 선원들이 옮긴 천연두가 신대륙에 퍼져 면역성이 약한 주민들은 만연되는 전염병으로 1천2백만 잉카인구 중 3백만 명이 희생 되었다. 이 전염병으로 1528년 잉카왕국의 카팍왕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아타후알파가 집권을 했지만 형제간에 분쟁이 일어나 잉카제국은 내란을 겪고 국력이 쇄약해지고 있었다. 


 카자말카 전투


 1531년 168명의 군사를 이끌고 잉카제국에 도착한 피자로는 전연 전쟁준비가 안된 잉카제국 8천명의 아타후알파 군사들을 카자말카성 안으로 유인했다. 


 금으로 휘장하고 인력 가마를 타고 온 아타후알파 왕에게 피자로가 성경을 건네주며 종교 개종을 종용 하였고, 왕이 성경을 땅에다 던져 버리면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피자로 형제들은 대포 4문, 기마병 62명, 보병 106명, 소총 12정을 이용하여 무장이 되어있지 않은 잉카 군사들을 포함한 왕과 보좌관들을 기습작전으로 2천명을 학살하고 왕을 사로잡았다.


 특히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대포와 총소리에 사람이 쓰러지고, 보지도 못한 말을 타고 12척의 긴 창을 휘두르는 기마병 앞에서 개죽음을 당한 잉카 군사들은 왕과 함께 포로가 되면서 전투는 막을 내렸다.


 잉카왕국의 멸망


 피자로 형제들은 아타후알파왕을 처형하고 그의 동생 망코를 허수아비 왕으로 추대하여 잉카제국 전역의 금은을 약탈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 망코왕은 한때 잉카 군을 동원하여 반기를 들었지만 잉카제국은 무기도 개발되지 않았고 전략부족으로 증가되는 스페인 군사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악랄한 방법으로 약탈을 일삼던 피자로는 이득관계로 동업자들에게 살해당했고, 결국 그를 포함한 4형제 모두가 비참한 죽임을 당하거나 감옥소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개인으로서는 최초로 금의 저주를 받은 기록을 남겼다. 피자로 사망후 스페인 제국은 잉카왕국을 점령하여 1572년 잉카왕국의 멸망을 초래했다. 금 맛을 들인 스페인 제국은 페루 국민들을 동원하여 금광과 은광을 개발했다. 페루 국민들은 가족 당 한명이 수용소 같은 광에서 혹사를 당하고, 3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가면 다음 가족이 광으로 향해야 했다.


 풍부한 농작물이나 의류는 세금의 형태나 비싼 스페인 수입품 구입으로 약탈당했다. 이로 인해 인구 12만이었던 쿠스코시 인구는 2만으로 줄었고 이러한 비극은 페루가 독립되는 1821년까지 지속되었다. 5백년의 뼈아픈 지배를 받아온 페루 국민들은 명절날도 울음의 피리소리와 슬픈 노래로 한을 달래야 했다. 


 금의 저주를 받은 스페인


 스페인은 약탈한 금으로 페르디난도왕을 계승받은 챠알스 5세까지 유럽에서 최강 부국으로 부상 했으나 결국 일하지 않고 약탈한 금으로 이웃 국가 에서 생산된 공산품이나 네덜란드가 아시아에서 들여온 수입품을 비싸게 구입하는 소비경제로 전락했다. 


 쌓이는 금은 악성 인플레를 조성하게 되었고,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몰과 더불어 필립2세 이후 스페인은 유럽에서 몰락해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여 금의 저주를 받은 국가가 되었다. 


 결론


 아담 스미스는 “세계의 부는 노동의 대가로 이루어진다. 금이나 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벤자민 프랭클린도 “국가의 금이나 은 축적량으로 국가의 부를 측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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