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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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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미합중국 14대 대통령-프랭클린 피어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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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합중국 횡단 철도

피어스는 연방정부의 인프라 정책을 반대하는 민주당 정책을 따르지 않고 1853년 제퍼슨 데이비스(1808-1889) 국방장관을 임명하여 미래 합중국 철도망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지형측정의 임무를 맡겼다. 데이비스는 미군 공병대를 동원하여 지형측정도를 만들었고 제임스 게스든 철도사업가를 피어스에게 소개하여 남부철도횡단 철도에 필요한 토지를 멕시코로부터 구입하게 하였다.

 

피어스로부터 멕시코 대사임명을 받은 게스든은 1853년 12월 30일 멕시코 시에서 안토니오 샌타나 멕시코 대통령과 회담을 하여 아리조나주 서남부와 뉴 멕시코 남부의 76,000 평방 KM의 토지를 1천5백만 달러에 구입하는 토지구입 요청서를 냈으나 회담진행 중 미 의회는 구매가격 5백만 달러를 줄여 1천만 달러의 예산을 책정했다.

 

미국과 멕시코전쟁으로 재정난을 겪고 있던 샌타나는 1854년 6월 8일 책정된 토지를 1천만달러로 매도하는 게스든 구입협약에 서명하였다.

후에 미국 철도의 아버지 찰스 크로커(1822-1888)는 1869년 유니온 패시픽 철도회사와 센트럴 패시픽 철도회사의 철도를 연결하여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연결하는 첫 번째 미합중국 횡단 철도를 완공했고, 남부 패시픽 철도회사를 구입하여 1883년 뉴오얼린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두 번째로 횡단철도를 완공했다.

 

동서남북을 잇는 횡단철도가 거미줄같이 연결되면서 19세기를 넘어 20세기에 미합중국 경제가 대 약진하였다.

피어스의 철도사업계획은 후에 경제대국으로 패권을 잡게 된 미합중국 경제개발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풍부한 자원을 찾아 사람이 모이면 잠용같은 사업가들이 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기본조건이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1차 대전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건설한 독일의 아우토반이 2차 대전 이후 폐허에서 1948년 독일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키게 하였다. 1964년 독일 방문 시 독일 고속도로를 통찰하고 감명을 크게 받은 박정희 경제국부가 1970년 2년 5개월 만에 완공한 경부고속도로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게 했다. 중국도 한국을 모방하여 전국에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경제를 크게 일으키고 있다.

 


페리원정(1853-1854)

1852년 11월 필모어 전 대통령이 시행한 페리원정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향하여 피어스는 일본과 국교 및 통상조약을 맺었다.

 


켄서스-네브라스카 법(1854)

피어스의 대륙횡단 철도 계획은 켄서스 네브라스카 미 서부지역을 연결시키는 수천 개의 농장을 개발하고 캘리포니아 금광개발로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위도 36도 30분 이북을 차지하고 있어 1850년 미저리협약에 의해 반 노예지역으로 협정되었다. 노예를 수용해야 하는 남부농장주들에게는 관심 밖의 지역이었다.

 

남부농장주들의 농토개발 관심을 이끌기 위해 스티븐 더글라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켄서스와 네브라스카 지역에서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노예제도를 결정하게 하는 켄서스-네브라스카법을 상정하여 1854년 5월 30일 피어스의 서명으로 실효되었다.

이로 인해 켄서스지역은 남부의 노예제도와 북부의 반 노예제도를 주장하는 주민들의 무장 충돌로 인해 피로 물들어 피흘리는 켄서스(Bleeding Kensas)가 되었다.

 

이 법을 반대하는 위그당원들과 반 노예제도를 선호하는 북부 민주당원들은 1854년 3월 2일 공화당을 창당하여 반 노예제도 및 노예해방에 앞섰다. 이 법은 곧 발발하게 될 남북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1856년 대선 경선(1856)

1856년 6월 1일부터 6일간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피어스는 자신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켄서스-네브라스카법 통과와 도망자 노예법 시행으로 북부 민주당의 인기를 잃어 그의 추측을 벗어나게 만들었다.

첫날 경선에서 122표로 135표를 받은 뷰케난에게 밀리다가 더글라스 후보가 뷰케넌을 지지하면서 피어스는 16번째 경선에서 탈락되고 17번째 뷰케넌이 296표의 만장 일치로 지명되어 1856년 11월 4일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은퇴(1857-1868)

피어스는 1857년 3월 4일 백악관을 떠난 후 뉴 햄프셔주 포츠머스로 이사하여 부동산에 투자를 하고 부인과 3년간 유럽여행을 즐겼다.

186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피어스는 당내 통합을 강조했으나 민주당 분열로 에이브러햄 링컨 공화당 후보가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피어스는 링컨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미 연방은 전쟁대신 남부의 노예제도를 수용하여 노예제도 2원제를 유지해야 된다는 비현실적인 정치이념을 갖고 있었다.

1863년 12월 2일 허약한 부인 제인이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막내아들 사망 후 슬픔의 그늘로 살았던 제인은 콩코드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망(1869)

독신이 된 피어스는 폭주로 외로움을 달래고 끝내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부인을 따라 미국성공회로 개신하고 세례를 받았다. 정치에 계속 관심을 갖고 앤드루 잔슨 17대 대통령의 전쟁복구사업을 지지했다.

1869년 여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피어스는 1869년 10월 8일 콩코드 자택에서64세의 나이에 간경화증으로 사망했다. 율리시스 그랜트 18대 대통령은 피어스 장례식을 국장으로 예우하고 그의 시신은 부인 묘 옆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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