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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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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8)-밀라드 필모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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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원정(1853-1854)

1850년 9월 9일 캘리포니아를 미연방 31번째 주로 영입한 필모어는 중국과 교역을 하면서 메니페스트 데스티니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을 포함한 일본의 아시아지역을 서부 개척지로 선정했다. 그 당시 미국의 고래어선들이 일본 근해에서 고래잡이를 하고 있었고, 일본이 아시아 지역 입구로 선정되어 필모어는 일본과 외교관계를 우선순위에 올렸다.

 

일본막부는 220년간 쇄국정책으로 서양문명을 받아드리지 않고 있었다. 미국은 1790년부터 1853년까지 27차례에 걸쳐 일본과 국교를 맺으려 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1852년 11월 필모어는 14세부터 해군병이 되어 17세에 소위로 임관하고 1812년전쟁 멕시코전쟁 등으로 공을 세우고 한때 러시아대사직을 지낸 매튜 C 페리(1794-1858) 제독을 일본원정대 해군제독 및 일본대사로 임명하고 일본 막부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전하게 했다.

 

 ‘미국 대통령인 저는 미 해군의 최고 사령관인 매튜 C 페리제독을 통해 폐하께 이 친서를 보냅니다. 미국은 종교나 정치적인 압력을 배제하고 오로지 일본과 친교 위주로 상업 및 문화를 포함한 국교를 맺고자 합니다. 페리제독은 미국을 대표하여 폐하와 위에 상기한 친선 국교를 위한 협상임무를 갖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미국의 선박이 석탄과 물을 비롯하여 항해에 필요한 기타 물량공급과 교역을 위한 항구를 개항해주시고 난파로 인한 미 선박 선원의 신변을 보호해 주시면 양국에 서로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폐하께서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한 페리제독에게 회답을 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1852년 11월 24일 페리는 3척의 증기 군함과 1척의 범선 군함을 이끌고 버지니아주를 떠나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하여 1853년 1월 24일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을 지나 5월 4일 중국 상해항에 도착했다.

 

5월 17일 페리는 2척의 증기 군함과 2척의 범선 군함을 재정비하고 상해를 떠나 5월 26일 류큐왕국의 나하 앞바다에 정박했다.

페리는 류큐왕국의 저항을 무시하고 무장한 병력으로 슈리성까지 진군하여 대통령 친서를 전달했다. 페리는 7월 4일 미 독립일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바다에 함포사격을 가하여 미 해군의 막강한 무력을 과시했고 무작위로 주위 섬들을 돌아다니며 측량했다.

 

페리는 일본에게 개국을 위한 회담을 강요했지만 일본의 막부 도쿠가와 이에도시는 병치레를 하고 있어 1년 후에 회담결정을 하자는 조건으로 7월 17일 홍콩으로 돌아왔다.

7월 27일 도쿠가와 이에도시가 사망하고 병약한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막부의 대를 이었다.

1854년 2월 13일 페리는 3척의 증기선 군함과 6척의 범선 군함에 1000여명의 해군 해병대를 동원하여 류큐를 통해 우라가에 내항했다.

 

어마어마한 해군시위에 기가 죽은 일본 막부는 3월 31일 필모어의 친서대로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고 서방세계의 문명을 받아드려 세계 열강에 오르는 기회를 만들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을 포함한 수많은 유럽 열강 중 잔머리를 굴려 열강 사이의 어부지리를 찾지 않고 미국을 선택한 막부의 결정은 일본민족의 축복이었다.

 

1852년 위그당 대선 전당대회(1852)

1852년 6월 17일부터 3일간 열린 위그당 대선 전당대회에서 1950년 도망자 노예법을 통과시킨 필모어는 남부의 지지를 얻었지만 북부의 강력한 반발로 대선후보를 포기하고 데니얼 웹스터 국무장관을 대선 후보로 지지했다. 불행스럽게 10월 24일 웹스터의 사망으로 윈필드 스캇장군이 공천에 지명되었고 필모어의 대통령 임기는 1853년에 끝나게 되었다.

 

찾아온 비극(1853-1854)

1853년 3월 4일 프랭클린 피어스 14대 미 대통령 취임식에 필모어와 함께 참석한 부인 애비게일은 독감에 걸려 고생하다 3월 30일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버팔로에 부인을 안장시킨 필모어는 슬픔이 가시기전 1854년 7월 26일 병약한 모친을 도와 18세부터 백악관 내조를 맡았던 32세의 외동딸 메어리가 콜레라로 사망하여 계속적인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

 

1856년 대선(1856)

필모어는 지지자들의 힘을 얻어 1854년 남북대립에 정치적인 개입을 하지 않고 구교와 이민자를 배척하는 모르쇠당을 창당하여 1856년 대선에 출마했다. 1856년 11월 4일 개표에서 총 174개 중 8개의 선거인단 표를 받고 21.6%의 지지율로 낙선했다.

 

재혼(1858)

1858년 2월 10일 멋쟁이 전직대통령으로 알려진 필모어는 부호로 알려진 케럴라인 매킨토시 미망인을 만나 재혼을 하게 되었고, 돈 걱정 없이 자선사업을 하며 은퇴생활을 영위했다.

1860년 선거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의 노예해방과 연방군 동원을 찬성하였고 남북전쟁시 45세 이상으로 구성된 북부 뉴욕주 군대를 지휘하였다.

 

사망(1874)

평생 건강했던 필모어는 1874년 2월 중풍을 맞고 3월 8일 두 번째 중풍으로 사망했다. 링컨의 첫 번째 부통령이었던 해믈린과 상원의원들을 포함한 많은 정치인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여 애도를 표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필모어가 미 상원이 올린 1950년 도망자 노예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면 미 대통령 평가순위에서 5위 상위권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연방군의 군사력을 쓸만한 뚝심과 배짱이 결여된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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