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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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편지-이세벨의 가르침에 현혹된 두아디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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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내가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종들을 가르쳐 꾀어 음행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 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오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지인 알지라. 내가 너희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지울 것은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창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18-29)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동쪽으로 72키로 정도 떨어진 곳으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처럼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는 아니었다. 옷감과 가죽 제품 등을 생산하는 도시가 두아디라였던 것이다.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에게 많은 도움을 준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온 여자였다.

 

이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는 다른 여섯 교회에 보낸 것들보다 길다. 이에 대해 어드만 박사는 “예수님은 일곱 도시 중 제일 중요하지 않은 곳에 있는 두아디라 교회에 제일 긴 편지를 보내셨다.”라 지적했다. (Charles R. Erdman: <The Revelation of John>. P.56)

 

다른 여섯 도시들보다 덜 중요했는지는 몰라도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점들은 다른 교회들 못지않게 심각했다. 그 교회의 문제는 외부의 압력이나 핍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었다.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가 예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의 서두였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시면서 눈이 불꽃같다고 하신 것은 그의 눈은 “만물보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속을 낱낱이 들여다 보실 수 있음을, 발이 “주석과 같다.”하신 것은 그가 악의 세력을 멸하시고, 모든 악행을 처벌하는 권능의 소유자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편지를 시작하시면서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들을 모두 들추어내어 처벌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나는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라.”고 그들을 칭찬하신다. 자신을 향한 시들지 않는 열정과 사랑을 지니고 그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충성하는 성도들을 격려하시며 사기를 북돋아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봉사와 섬김을 인정하신 후 예수님은 그들이 잘못한 점을 책망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교회가 아무리 크고 성도 수가 많으며, 그 활동이 활발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의 기반 위에 서있지 않으면 어느 때라도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클레이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지 못한 교회는 아무리 규모가 크고, 교인들이 많아도 “성공적인 기독교인들의 집단”일 뿐이라 말해준다.(William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P. 104)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하신 책망은 “너희는 자칭 예언자라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고 있다.”였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7대 임금 아합 왕의 아내였다. 그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알 신을 섬기게 했으며, 숱한 선지자들을 죽었고,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그를 죽이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 그녀의 내시들에 의해 창 밖으로 내던져 져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처럼 악녀의 상징인 이세벨과 같은 여자가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예언자라 자처했다. 참된 예언자는 사도, 목사, 교사 등과 더불어 초대교회에서 존경 받는 하나님의 종이었다.(고전 12:28; 엡 4:11)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은 성도들에게 “음란행위”를 용납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좋다고 가르쳤다. 그 같은 가르침은 “발람과 발락의 속임수“와 ”니골라 당의 교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도 침투했었다.

 

에베소 교회에서는 니골라 당의 행위가 배척을 당했지만 버가모 교회의 경우에는 일부 교인들이 거기 빠져들어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야 했다.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대다수의 성도들이 그 가르침에 동조했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하나님에게 직접 대항하는 행위였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라고 명시되어있다.(사 54:5; 렘 3:20)

 

신약에도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라고 밝혀주고 있다(고전 11:1-2; 엡 5:24-25). 따라서 교회나 성도들이 정절을 지키지 못한다면 신부가 신랑을 배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은 것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이 무엇보다 중요시 하는 율법을 준수하려면 하나님 한 분만을 섬겨야 하며, 우상을 만들거나 그 앞에 절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주 후 49년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열렸던 종교회의에서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에게 율법준수의 무거운 짐을 지우지는 말되 음란행위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못하게 하자고 결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세벨의 가르침은 성경말씀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세벨의 교훈은 발람과 발락의 술수와 니골라 당의 교리처럼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교회를 충실히 섬기며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다고 성도들을 설득시켜 그들을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사탄의 기만전술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더욱 슬프게 했던 것은 그 같은 사탄의 사악한 방법을 간파한 성도들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이세벨의 말을 따르는 성도들이 주도하는 한 두아디라 교회는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밝히며, 혼탁해진 사회를 정화시키지 못하고 그 당시 존속했던 수많은 이방종파 중의 하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길을 두아디라 교회는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가룟 유다가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에게 돌아오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사랑의 권고를 외면하고 캄캄한 밤의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듯이.(요 13:21-30)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두아디아 교인들이 올바른 영적 분별력을 발휘하여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여러 차례 권면하고 경고하며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죄의 길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탄의 대변인 이세벨의 간교한 위장전술의 포로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이세벨의 거짓에 귀 기울이는 성도들의 무지를 꾸짖으며 그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는 이세벨을 병마와 고난의 침상에 던지고, 그녀의 기만에 속아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탄의 음흉한 의도대로 이끌려가며 하나님과 대적하는 이들도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죄악을 범하는 것은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사명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죄의 길을 걷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죄악 된 길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클지라도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님의 품에 안기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 죄의 대가인 죽음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두껍게 싸서 은밀하고 깊은 곳에 묻을 지라도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죄악은 있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아디라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른 교회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게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예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그의 의와 사랑과 권능으로 통치하실 때 그에게 충성한 성도들도 참여하게 하는 영광과 기쁨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시다.

 

새벽 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계 22:16). 사탄의 악랄한 계교와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성도들에게는 그 자신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어둔 세상을 그의 광명한 빛 가운데 걷게 하시고, 죄악과 불의와 혼란 가운데서도 그의 진리 위에 굳게 서게 하시며, 천성을 향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동행해 주시겠다는 언약이신 것이다.

 

새벽 별의 인도함을 받아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낙원을 향해 걸어가느냐 아니면 사탄의 유혹에 속아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세상의 영화를 누리며 사느냐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러나 무엇을 택하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우리들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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