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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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편지-고난 당하는 서머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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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2:8-11)

 

에베소 교회 다음으로 예수님의 편지를 받는 교회가 서머나 교회인 것은 필연적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 당시 아시아에서 에베소 못지않게 각광을 받았던 도시가 서머나였기 때문이다.

 

에베소 북쪽 64키로 지점에 위치한 서머나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다. 당시에 에베소가 아시아에서 제일 중요한 도시였다면 서머나는 “아시아의 장식물”, “아시아의 면류관”, “아시아의 꽃”으로 알려진 매력적인 도시였다.

 

전설적인 시인 호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서머나는 도시 계획이 아주 잘되어 있었다. 또한 시셀로((Marcus Cicero)가 “서머나는 우리의 가장 오래되고 충실한 우방”이라 말했을 정도로 로마 제국에 충성스러웠기에 서머나는 로마 황제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서머나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숫자도 많았지만 그들이 도시 건설을 위해 기증하는 금액이 워낙 컸기 때문에 도시 당국자들의 그들을 향한 비중 또한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시대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은 엄청나게 컸다. 많은 유대교 신봉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그들이 기독교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큰 원인 중의 하나였다.

 

그들의 기독교를 향한 증오심은 서머나에서의 기독교 탄압으로 이어졌고, 서머나 교회 주교 폴리갑이 그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폴리갑은 주후 155년 2월 23일에 서머나의 경기장에 마련된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했다. 그날 그 경기장에 모여든 군중들은 “이단자를 처벌하라.”며 폴리갑을 잡아오라고 외쳐댔다.

 

그러자 서머나 총독은 폴리갑의 거처로 군대를 보냈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병사들이 들이닥치자 폴리갑은 인솔 장교에게 기도할 수 있게 한 시간만 여유를 달라고 요청하고는 그가 기도하는 동안 병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라고 가족들에게 지시했다.

 

인솔 장교는 폴리갑에게 “황제는 신이십니다.”라고 한 번만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무사하실 수 있습니다.”라 권했다. 그러나 폴리갑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시라.”며 단호하게 그의 청을 거부했다.

 

폴리갑이 경기장으로 들어서자 총독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로마 황제를 숭배하겠다고 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폴리갑은 “내가 86년 간 예수님을 섬기는 동안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버린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찌 주님을 모른다고 하겠소.”라며 총독의 명령에 불복했다.

 

그러자 군중들이 다투어 가며 그들 화형에 처할 단을 쌓기 시작했는데, 많은 유대인들이 단을 쌓기 위한 재료들을 날랐다. 안식일 준수를 생명처럼 귀히 여기는 그들이 폴리갑을 죽일 사형대를 쌓는 노동을 안식일에 한 것이다.

 

사형집행관이 단에 불을 지르자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러자 불길은 폴리갑 주위에 천막모양을 이루어 불길이 그에게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사형집행관이 긴 칼로 그를 찔러서 죽였다고 전해진다.

 

존슨(Alan Johnson)은 그의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그때 로마 황제를 숭배하라며 기독교를 핍박한 상황을 일제가 한국교회에게 신사에 참배하라고 강요한 것에 비유했다.

 

기독교 탄압이 날로 심해지는 시점에서 서머나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는 예수님은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라 하셨다. 하나님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사 44:6, 4812)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하신 것은 그는 서머나 교회를 괴롭히는 사탄보다 먼저 있었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사탄의 모든 계교를 분쇄할 권능이 소유자이시라 알려주신 것이다.

 

동시에 예수께서는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말씀하심으로 죽음을 정복한 그가 환난과 고통 중에 있는 서머나 교회를 지키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이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며, 죽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나는 너희의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환난”의 원래 의미는 엄청난 무게에 눌려서 움직이지도 못하며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뜻한다. 당시에 서머나 교회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압박과 유대인들의 적대와 박해로 인한 압력에 눌린 상태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 같은 환난과 궁핍함을 알고 계시다고 그들에게 들려주신 것이다. 부유한 도시에서 왜 서머나 교회가 재정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는가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 충성하는 까닭에 서머나 교회는 여러 면에서 차별대우를 받으며 불이익을 당했을 것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한국교회가 일제말기에 당했던 비슷한 핍박과 부당한 대우를 서머나 교회도 받았을 것이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억울함을 알고 계시다고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너희는 가난한 것이 아니라 부요한 사람들”이라 들려주신다. 서머나 교인들의 영적 풍요로움을 말씀하신 것이다. 1세기에는 많은 교회들이 물질적으로는 지극히 궁핍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성숙해 있었기에 갖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겨내며 주의 일에 충실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들이 엄청난 규모의 예산을 자랑하며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교회에서 예배 드리지만 영적으로는 고갈된 상태여서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며,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현상이었다.

 

환난과 핍박보다 더 서머나 교회를 힘들게 했던 것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횡포와 박해였다. 유대인들은 관권과 결탁하여 서머나 교회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어렵게 했을 뿐 아니라 온갖 거짓을 동원하여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혐오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성찬예식을 행하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언약이니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고전11:25) 하신 것을 기독교인들은 야만인들처럼 피를 마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도들이 “성찬예식”을 “사랑의 애찬식”이라 부른 것을 “그들은 모여서 음란한 짓들을 한다.”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렸으며, 기독교인이 되면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고, 부모와 자식들의 사이가 벌어진다는 허무맹랑한 소문까지 유포하였다.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가면 황제숭배를 못하게 되니 국민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을 회유하기도 했으며, 교회에서 불의 심판을 언급하는 것을 교묘하게 풀이하여 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붙이는 비열한 모함까지도 서슴없이 자행했다.

 

그들은 서머나에서만 기독교를 박해한 것이 아니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는 관원들과 현지 유지들을 선동하며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를 방해했으며(행 13:50, 14:2,5), 루스드라에서는 바울을 돌로 쳤고(행 14:19), 데살로니가에서는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바울과 실라에게 폭행을 가하는(행 17:4-5) 등 갖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대적했던 것이다.

 

그들이 이처럼 기독교를 증오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그들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지만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다.”라 말씀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구원받은 신분이라 자부했지만 실상은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핍박은 더욱 심해져서 서머나 교인들을 감옥에 집어넣어 고통을 받게 할 것이라 경고하셨다. 그때 옥에 갇힌다는 것은 일정기간 갇혀 있다가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사형을 당할 때까지 거기 머무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가 받을 박해는 순교에까지 이르게 될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각오하고 끝까지 충성한다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가을날 오솔길을 산책하듯이 안락하고 편안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을 따르면 세상의 환란과 핍박과 고난에서 면제받는다는 가르침은 없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세상을 향한 모든 욕망은 물론 부모 형제자매까지도 버릴 각오를 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인들이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고 언약하신 것이다. 동시에 내 명령에 따라 죽기까지 충성함으로 승리한다면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심으로 그에 대한 충성의 대가는 영생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서머나 교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는 “두려워하지 말고, 생명의 면류관을 향해 전진하라.”는 것이었다. 사탄의 역사는 강하고, 악랄하고, 간교하다. 따라서 그런 사탄의 박해를 받으며 주의 길을 가야 하는 성도들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크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탄의 모든 계교를 알고 계시며 사탄을 통제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며 좁고도 험한 의의 길을 걸어간다면 우리의 종착역은 찬란한 영광에 싸인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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