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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光復)의 뿌리는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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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18일 경성비행장(여의도)에 비행기 한 대가 내려앉았다. C-47 수송기였다. 비행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정진대원’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가 타고 있었다. 이들은 이날 새벽 버드(Willis H. Bird) 중령 등 미군 정보처 OSS 대원 18명과 동행하여 중국 시안 비행장을 이륙했다. 정식 명칭은 미국군사사절단(작전명 사절단)이었다. 미군 중에는 한국계 함용준, 정운수, 서상복이 동행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곳 여의도에 도착한 한국인은 7명이었다. 

 

 


 비행기가 서해바다를 날고 있을 무렵 이범석 장군이 필을 꺼내 들었다. “보았노라 우리 연해의 섬들을/왜놈의 포화가 빗발친다 해도/비행기가 부서지고 이 몸이 찢기워도/찢긴 몸이 연안에 떨어지리니/물고기 밥이 된다한들 원통치 안으리/우리의 연해 물마시고 자란 고기들이/그 물고기들이 살찌게 될 테니”


 동시에 일행들도 오랜만에 보는 고국산천에 감회가 새롭게 외쳐대고 있다. “아 조국 땅이 우리를 마중한다. 송이구름이 버섯처럼 피어나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밑으로는 서해안 섬들이 바다 속에서 솟아오르듯 떠올라 나옵니다. 옥색하늘이 엷게 풀어지고 남색바다가 치마처럼 펼쳐지며 섬들이 크게 작게 벌어지며 수송기 창가에는 조국의 향내가 가득합니다.” 일행들은 이구동성 오랜만에 보는 고국산천에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여의도 공항 활주로 끝에 멈춘 비행기에서 광복군 정진대와 미군이 내리자 착검을 한 일본군이 포위망을 형성하면서 좁혀왔다. 일본도를 뽑아든 대열도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 ‘히로히토’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지 사흘이 지난 8월 18일 오후였지만 여전히 한반도는 일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8월 15일 이후 한국인의 봉기를 우려해서 도리어 치안을 강화한 상항이었다. 


 공항에는 ‘제로센’ 20대를 포함해서 비행기 50대가 진열돼 있었다. 미군은 연합군 포로와 접견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은 이를 거부했다. 대화가 막히자 일본군은 탱크 두 대를 끌고 나오고 활주로에는 박격포를 배치하였다. 


 정진대원 넷은 오른쪽 겨드랑이에 멘 토마건 기관단총의 자물쇠를 풀었다. 김구 주석의 명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이름으로 조국에 들어가 장렬히 전투를 벌이라는 것이었다. 비로소 그때 한국은 참전국이 될 수 있는 터였다. 그들의 운명은 살아서는 귀환할 수 없는 것이었다. 


 품에는 실탄을 장진한 ‘리벌버’ 권총과 허리춤에는 수류탄이 매달려 있었다. 네 명은 서로의 등을 기대면서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목숨 따위는 벌써 짙푸른 서해바다에 흩어버리고, 조국 땅에서 죽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여기고 온 그들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단장 버드 중령이 정진대원들을 제지했다.


 이튿날 새벽, 여의도 비행장 책임자 시브자 대좌와 우에다 하데오 소좌가 여의도 일본군 막사에서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대기하고 있던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 광복군 정진대원을 찾아갔다. 맥주와 사케를 들고 온 일본군은 무릎을 꿇고 술을 권했다. 


 긴 실랑이 끝에 이튿날 새벽 다섯시 무렵 평양에서 실어온 가솔린을 채운 비행기는 그들을 태워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중국 산등성으로 향했다. 정진대원 넷은 낙하산을 타고 뛰어 내려서 전투를 전개하려 했으나 버드 중령이 다시 이들을 말렸다.


 장준하 항일수기 <돌베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오랜만에 밝은 고국산천 시야는 허허한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사람씩 내렸을 땐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미군병사 몇 명뿐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에 모두 사라졌다. 조국의 11월 바람은 쌀쌀했고 하늘은 청명하지도 않았다. 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구나? 우리가 갈망한 국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이었구나? 나는 소처럼 땅바닥을 군화발로 비벼댔다. 나부끼는 우리의 국기, 환성의 환영인파, 그 목 아프도록 불러줄 만세소리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검푸른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다.“


 장준하 선생의 피 토하는 이 처절한 절규는 이미 많은 친일 인사들로 구성된 조국의 앞날을 예고한 울분이었던 것이다. 김구 선생을 비롯해 초대 건국위원장 여운영, 송진우, 장준하라는 거목을 회상하며, 70년 만에 찾은 민주주의의 꽃은 이렇게 위대했고, 우리 국민의 힘의 원동력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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