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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선의 왕들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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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선의 왕들보다 낫다

 

 세상사 하도 변천이 많아 옛날 얘기를 해본다.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은 대한민국 최초의 무선방송을 시작했던 방송국이며, 현재의 한국방송공사의 핏줄이다. 1924년 11월 총독부 체신국 구내 무선실험실에서 50W 실험방송이 실시되었고, 1925년 여름에는 400W JODk의 호출부호로 매주 4회씩 정기적으로 방송을 하다 연합군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해방 전에는 서울 정동 1번지에 자리 잡고 방송을 송출하였는데, 해방이 되자 재빠르게 남산으로 옮겨 최초로 방송을 시작한 것이 서울중앙방송국이다.(부호는 KBS, 자유의 소리, 서울중앙방송국, HLKA, 서울 KOREA) 


 해방이 되었지만 일제로부터 지원받던 라디오 장비가 끊기자 가난한 농촌에서는 귀에다 꽂고 듣는 이어폰 송화기 라디오가 등장하였다. 새까만 돌(광석)로 진공관 만들어 줄에 연결하여 귀에 꽂고 듣는데 채널이 없어 잡음이 많았다. 또, 소리가 작아 안테나 줄을 하늘 끝까지 매달아 마을 뒷동산 노송은 안테나용으로 단골메뉴가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는 한 세대를 앞서가는 형들의 덕으로 라디오(최초의 국산 진공관 라디오인 ‘금성 A-501)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라디오는 그런대로 성능이 좋았으나, 자주 고장이 나서 주파수를 돌리면, 뿌럭뿌럭 소리가 요란하여 얼마 못가 고물 처리를 하고 말았다. 그 후 50년대부터 트랜지스터가 등장하여 라디오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됐다. 


 유성기(측음기)있는 집도 드물었다. 난 외삼촌이 일본 유학을 끝내며 사가지고 온 것을 몇날 며칠 엄마를 졸라서 가져왔지만 실제는 뺏어온 거나 진배없다. 그 바람에 외사촌형들이 빨리 안가져오면 혼내겠다는 협박에 한동안 외갓집을 못 갔지만, 그 유성기로 인해 소꿉친구들에게는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어 으쓱대기도 했다.
 

유성기를 오래 틀다보면 태엽이 끊어진다. 그럴 때는 끊겨진 부위를 장작불에 달구어 연결하여 고쳐 썼다.

‘산두복사’(일명 유성기 머리)가 고막이 찢어지면 다 쓴 치약 곽을 반듯하게 오려서 산두복사에 그려 촛농으로 용접하여 들으면 그 소리가 일품이었다. 바늘도 여러 번 쓰다보면 무디어져 숫돌에 갈아 쓰기도 하였다.

그 당시는 오아시스레코드,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충무로에 2곳 밖에 없어 유성기, 라디오 부속들을 구하려면 이곳을 이용했다. 


 1950년대 말~1960년대에는 아나운서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KBS 장기범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던 재치문답 스무고개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때 출현자는 두꺼비 안의섭, 의학박사 한복남 등 여러 박사들이 등장했고, 임택근과 강영숙의 염문설은 당시로는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임택근, 이광제 아나운서의 축구중계는 당시 스포츠에서는 최고 인기프로였다. 라디오 연속극으로는 한운사 작 “장마루촌의 이발사” “산넘어 바다건너” “김약국집 딸들”이 인기리에 진행되었고, 영화는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 유행했다.


 그 후 군사정부가 들어서며 박종세 아나운서가 5.16 첫 방송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여러 뉴스를 보도했다. 대표적이 것이 혁명공약이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 그친 사회악을 재정비하여 절망과 기아에서 허덕이던 민생고를 해결하고, 그것이 해결되면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고 했다. 신설동 시외전화국 근무할 때 당시 방송인들이 대담하던 것이 기억나 대충 기록했다. 


 일제가 서울시에 전차철로를 놓고 개통하는데 하필이면 개통하는 날 사람이 치어 갓을 쓴 노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사람잡는 쇠붙이를 당장 철거하라고 난리를 쳤다고 한다. 일제시대 최초로 천황이 전화기를 고종황제에게 선사를 했는데, 고종은 그것이 신기하여 대신들 집에 시도 때도 없이 걸어 대신들이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플래시(덴지) 역시 밤길 갈 때나 화장실용으로 사용하라고 천황이 특별히 고종에게 보냈는데, 고종은 "고놈, 참 신기하도다. 신기하도다“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니, 한 나라의 임금이 낚싯밥인 줄도 모르고, 그토록 어리석었으니 어찌 나라가 지탱을 할 수 있었겠는가. 


 문학박사 양주동 선생의 이야기, 일본 고관집과 조선의 고관집 출신이 결혼하게 되었는데, 조선 신부집은 아직 한달이나 남아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는데, 일본집 잔치손님들이 갑자기 들어닥치는 것이었다. 뒤늦게 알고 보니 조선에서는 음력을 세고, 일본은 약력을 세는 엇갈린 해프닝이었다.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일본식 교환전화기부터 시작한 통신시설은 독일식 다이얼 전화기로 이어지며 무선전화가 등장하나 싶더니 현대에 와서는 스마트폰이라는 요물까지 생겨났다. 거기에 카톡까지 옵션이 생겨나, 서울의 친척들이 카톡을 안 깐다고 성화라 할 수 없이 깔았더니 시간개념을 모르는 노인들이 시도 때도 두드려대 오밤중에도 카톡, 카톡 소리를 질러대 자다가 벌떡 일어나야 했다. 


 어찌하겠는가? 이것도 문화의 혜택인 것을. 조선시대 임금이 백리를 가려면 나팔 불고 피리 불고 하루종일 걸리는 길을, 지금 그 거리쯤은 승용차로 1시간이면 갈 수 있고, 카톡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니, 내가 조선 임금들보다 낫지 않은가? 이 풍진 세상에 투자한 것은 많고, 보상받은 것은 적어 억울해서라도 백살은 더 살아야겠다. 

 

201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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