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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배우는 기쁨(50)
chungheesoo

 

 
(지난 호에 이어)
하나님은 극히 미소한 소립자부터 대지진 같은 엄청난 것도 주관 하신다. 하나님은 보이는 것 또는 보이지 않는 것도 정하신다.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다. 하지만 너희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그 새들보다 훨신 귀하지 않느냐? 또 너희는 왜 옷에 대하여 걱정 하느냐? 들판의 백합꽃들도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옷감도 짜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솔로몬이 그의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입하신다면,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태복음 6:26-30)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거대한 것만 주관하시고 미소한 것은 사람이 취급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인간은 동업자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사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것들 중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마태복음 10:29-30)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께서 인류의 모든 민족을 하나로부터 만드시고 그들을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사는 때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는데, 이는 혹시 그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자 하면 그분을 찾게 하시려는 것이니 그분께서는 과연 우리 각자에게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아니 하신다. 우리는 그분 안에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기 때문인데, 너희 시인들 중 어떤 이들도 말 하기를 ‘우리도 그분의 자손이다.” (사도행정 18:26-27) 


이러한 성경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역사에 대한 낙관성


기독교 역사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역사의 흐름은 희망 속에서 전개된다는 긍정적이고 낙관적 전진을 한다는 것이다. 최초로부터 하나님은 긍적적 목적을 정하시고 섭리하셨다.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적극성과 긍정성의 성격을 가진다. 


이 세상에는 한없이 많은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대홍수, 대지진, 쓰나미, 세계 전쟁 등 거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동시에 미소한 식물, 보이지 않는 균 같은 것도 일상 생활의 일부분이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화다. 전쟁 후에는 평화가 온다. 평화 후에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 행복한 날도 있고 불행한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이다. 전쟁같은 우리가 보기에는 흉악한 사건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한 것도 적극적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역사관의 기본자세다.


우리가 인류역사를 도덕적 측면에서 볼 때 많은 사건들이 모순으로 보일 수 있다. 문제는 기독교 역사관에서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은 의미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기준이 적용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준을 알 수 없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기준을 판단 할 수 없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어둠과 빛은 모순이다. 하지만 어둠과 빛은 하나님이 지으셨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만들고 환난도 창조하니, 나는 여호와다.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다.” (이사야 45:7) 


실은 어둠과 빛은 창조 측면에서 본다면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


 “어둠조차 주께는 어둡지 않고 밤도 낮과 같이 빛나니, 주께는 어둠과 빛이 같기 때문이다.”(시편139:12)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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