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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실패하였나(13)
chonhs

  

(지난 호에 이어)


나. 그래도 합격만 하면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이항복은 16세에 생원, 진사를 치르고 성균관에 입학한다. 성균관은 생원, 진사를 각 100명씩 선발한다. 그 전에 우선 1차 시험 초시, 2차 복시를 거쳐야 한다.


이항복은 성균관에서 5년 공부 후 최종시험, 알성시에 합격한다(24세. 선조 13년). 33명의 합격자에는 경복궁, 근정전에서 임금이 합격증서 홍패를 하사하고 그들 부모를 위한 잔치, 은영연을 연다.


악공이 연주하는 가운데 기생이 술을 권하고 재주꾼들이 흥을 돋운다. 이어 급제자들은 사흘 동안 임금이 하사한 어사화로 멋을 내고 시가행진을 하는데, 여기에서도 천동이 길을 안내하고, 악수가 풍악을, 광대가 이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재주를 부리며 흥을 돋구고, 그 뒤에 급제자가 말에 앉아 서서히 뒤따른다.


지방 출신은 광대들과 함께 고향에 내려가 고향 어른을 모신 가운데 홍패고사를 지내고 시가행진을 한다. 과거 급제는 고향의 영광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도 넉넉지 못한 집안에는 부담이 되어, 잔치에 재산을 탕진해 어려운 처지가 되어 평생 빚쟁이로 사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황홀한 축제 뒤에 덫이다.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모두 관직에 임명되는 것도 아니다. 당시 조선에는 정부가 임명하는 직이 중앙에 750여, 지방에 1000여 자리(문관)가 있어 관직 얻기가 쉽지 않았고, 그러던 중 직이 주어지면 이 또한 축하할 일이 되어 면신제라 하여 신고식이 있었다.


고참이 신참에게 향응을 베풀고 친목을 다진다는 뜻이다. 이 역시 광대와 기녀들이 따랐고 밤새 술과 노래, 그리고 춤으로 풍류를 맘껏 즐기는데, 짓궂은 선배들이 인분을 당나라 향료라 하여 얼굴에 발라주는 등 장난이 지나쳐 병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제한된 신분, 양반들만의 잔치였다. 우선 서당에 갈 수 있는 집안에서나 가능했다. 일반 농가에서는 서당에 입학할 5-6세의 나이이면 들에 나가 부모 일손을 도와야 했다. 또한 공자, 맹자, 천자문 등의 책값이 군포 두어, 또는 서너 필 값이었다. 당시 1년에 한번 내는 군포가 2필인데 평민에게 공부는 가당치 않았다.

 

난장판이란 말이 과거시험에서 유래됐다는데, 조선 중기 이후 급증하기 시작한 서당이 600여 곳, 조선 후기에는 900여 곳에 이르기도 했고, 전국의 응시자가 모이니, 3년에 한번 아마도 때로 난장판으로 보이기도 했던 듯하다.


조선의 교육열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대단했던 듯, 그러나 공부만 한 생원들이 과하게 늘어 부작용도 심해 대원군은 일부(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한다.


다. 양반의 비리


1. "아전 때문에 나라 망친다"라는 상소문이 있었다(숙종. 송시열). 그러나 " 양반 때문에---"라는 글은 없는 듯하다. 역사 기록은 양반이 썼을 테니까. 아전은 양반의 하수인이다. "이놈"하고 주의를 주면 꿈쩍도 못하는 신분이다.


이들은 관가에 빌붙어 수령의 업무, 대인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이다. 수령의 임기는 1-3년이라 자리가 자주 바뀌고, 중앙에서 내려온 터에 업무파악도 재대로 안 되고, 더욱 재임기간 중 대부분을 한양에 거주하고 있어, 실무는 사실상 아전이 담당하는데, 이들의 비리가 심해 백성을 어렵게 했다.


영국 여행가 비숍이 어느 관서지방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글을 보자. "관찰사(도지사)는 모든 가구에 100냥을 거두어 전신주를 세운다. 그러면 수령(군수)은 그것을 200냥으로 늘리고, 다시 아전이 250냥으로 늘려, 백성의 부담금은 250냥이 된다” 100냥의 세금이 250냥으로 늘어난 것이다.


아전(중인)의 역사는 조선시대가 들어서면서 고려의 지방호족 출신들은 토지와 관직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방 토박이인지라 현지사정에 밝고, 글을 아는지라 부임한 사또의 업무를 돕는 하급관리(아전)가 되었다.


이들은 조선사회에서 양반과 양인(일반 백성)의 중간 신분으로, 결코 낮은 신분이 아니었는데, 정부는 이들을 과거도 볼 수 없는 신분으로 얽어 매어 제도적으로 차별했다. 
달리 할 일도 없어 지방 실무행정가가 됐는데, 이들은 실질적으로 지방의 제2인자 였다. 백성의 생활에 매사 접촉하는 위치에 있고, 군대도 면제되고, 직이 세습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자리라 철종 때는 아전 직이 쌀 1000석 값에 해당됐다.


 2. 사대부도 먹어야 한다


어떤 관리도 관직에 항상 있을 수 없다. 당파싸움에 사직할 수도 있고, 조기 교체될 수도 있다. 결국 걱정 없이 살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는 점은 지금의 아버지들과 다를 바 없다. 


공자, 맹자 30년을 공부했지만 그들은 땀 흘려 일할 줄은 모르니, 관직에 있는 동안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가지면 더 갖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인데, 이것이 생계형을 지나 치부형에 이르면 이를 감당 못하는 농민은 반란을 일으킨다. 19세기 조선은 민란의 시대였다.


 철종 말년, 주로 3남 지방에서 관아를 파괴하고, 수령을 축출하고, 악덕 아전은 죽이는 등의 민란이 37개 지역에서 일어났다.


조선정부는 이에, 3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그 내용이 결국은 착취를 금하는 내용이어서 기득권의 이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얼마간 정부의 의도대로 민란이 가라앉았으나, 이번에는 양반들이 "못 살겠다"하는 터에 조치는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폐지된다. 


지배층 양반은 내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이었다. 이에 철종 13년(1862년)에 민란이 다시 일어났고, 고종 때에는 전국으로 확산(47개 지역) 되면서 수령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른다.


같은 시기, 부국강병이라면 무엇이던지 할 태세인 일본을 옆에 두고, 조선은 참으로 거꾸로 가고 있었다.


 3. 조선의 세금 징수는 총액제


정부가 일정금액을 군현 단위로 미리 정해, 세금수취의 안정을 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세수업무를 수령과 아전에 위임 함으로서 자의적으로, 제한 없이 수탈할 수 있는 함정을 만들었다.


악덕 수령 밑에 먹고 살 길이 없어 도망가거나, 민란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던 조선후기였다.


비숍의 글을 다시 보자. "어느 사람이 조그만 돈을 모았다고 알려지면, 관리들은 그것을 빌려줄 것을 요구한다. 만약 거절하면, 체포하여 당사자의 친척이 그 돈을 낼 때까지 곤장을 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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