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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100주년 기념 안보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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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조선은 이를 기초로 왕도정치를 추구하고, 삼강오륜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을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도덕적 수양과 왕도로 사회 안정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이상국가). 


이에는 인간은 탐욕스럽고, 정치는 부패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고로 도덕적으로 교육된 인간이 도덕정치(왕도)를 실천함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이룩할 수 있으며, 또한 지배층의 부패를 예방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6세기, 개혁의 이념적 근거인 성리학을 좀더 학문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논쟁이 야기되고, 17세기, 이 논쟁이 다른 논리(학파)를 배타시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상적인 학문이 현실에서 이상하게 굴곡하는 우를 범했다. 이 논쟁이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당파를 만들고, 이상적인 학문인 성리학은 현실에서 당파싸움의 도구가 되었다.


결국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논쟁으로 전락한다. "왕과 왕비의 상에 몇 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하는 논쟁(예송 논쟁)이 피 튀기는 정쟁이 되고, 18세기 더욱 심하게 되면서 조선 말기로 이어진다. 딱한 일이다.


이로서 정치-사회 개혁의 이념적 지주였던 성리학은 조선 말기 그 긍정적 기능을 상실하고, 조선 실패의 원인을 자임한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교사상 체계인 성리학은 농본주의적 중세사회의 학문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농업의 발전뿐 아니라 상공업이 발전되면서 사회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고, 이에 맞는 다른 사상이 필요했다.


성리학은 그 시대적 사명을 다했으나, 조선의 사대부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온 서구가 조총, 대포를 앞세워 문을 두들일 때, 조선의 사대부는 "공자왈, 맹자왈" 하며 익힌 사상으로 이를 대하고자 하니.


모택동도 중국의 후진성이 유교에서 기인했다고 봐 공자사당을 모두 부시는 등(홍위병), 과거의 전통과 결별을 선언했다. 


 다) 조선의 성리학


성리학은 유교에 철학적 세계관을 부여, 심성 수양의 도리로 확립된 학풍으로,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 했다 해서 일명 주자학 이라고도 칭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인간 사회에는 그 속에 본성적인 질서가 있다고 보았다.


즉, 자연이나 인간사회나 모두 위계질서를 갖고 있어, 동물 세계에서도 모두 똑같은 동물이 아니라 각기 다르듯, 인간 속에서도 이와 같이 모든 게 다 같지 아니하고, 그리하여 그 속의 인간은 각자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직분을 성실히 수행함이 인간 각자의 도덕적 의무라 했다.


이러한 성리학의 사고가 고려 말 신진 사대부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고, 이것이 조선 왕조 초기 개혁적 성격을 띄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적절하고 필요한 논리가 되어, 그 필요로 인해 조선의 주요 통치 이념이 된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저자 이언모리스는 “공부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그 시대의 통치에 필요한 이론을 찾아낸다” 했는데, 조선이 그러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15세기부터 16세기 중엽, 세조 이래, 공신 세력이 가문의 힘을 이용, 부를 확대해 가자, 이로 인해 땅을 잃은 양민이 노비로 전락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더하여 지배층의 비리와 탐학으로 농민은 과중한 조세부담을 지게 되고, 지방 사족(사림파, 지방의 중소 지주)들은 이러한 불안한 사회를 보고 이를 적극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정 속에 15세기 후반부터 사림파의 중앙 진출이 활발해지고, 이들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주장, 삼강오륜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을 기본으로 지배층의 도덕적 수양과 이를 통한 사회적 안정을 구현하려 하였다.


또, 사림파는 향촌질서 구현에도 고민하였는데, 이것이 향약 보급운동이다(이는 별도로 소개한다).


16세기 들어 성리학은 학문적 연구와 논쟁을 거쳐, 이를 조선의 독자적 사상체계로 발전시켰다. 도덕과 그 실천을 중시하는 기풍에 사우(교우) 관계를 중시하는 흐름이 가미돼 학파가 형성되었다.


17세기 이후 이러한 사우-학파의 연결이 정치적 상황과 충돌할 때, 자기 학파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당파로 변질되고, 18세기 들어, 이상적 국가의 추구로 시작된 성리학은 당파싸움의 도구로 전락하여, 조선 실패의 단초가 된다.


더욱이 성리학이 시대적 유용성을 다해가는 상황으로, 17세기 후반부터, 조선사회에서 나타나는 농업, 상공업의 발전으로, 14~16세기와는 사뭇 다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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