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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고(4)-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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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라. 원산의 인상


금강산을 지나 원산에 이르니, 시내에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가 보인다.


우선 전신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약 1만5000명이 살고 있는 원산은 조선의 발전하는 도시였으나 시내는 여기에서도 퀴퀴한 냄새가 난다.


이곳에는 가장 깨끗한 주택가로, 조선에서 가장 매력적인 일본인 정착촌이 있다. 잘 다듬어진 길과 깨끗한 부두, 일본 영사관, 일본 상선, 우편선 회사, 평판 좋은 일본 은행, 깨끗한 세관, 유럽 물품을 좋은 가격에 제공하는 상점, 유럽식 복장의 선생이 지도하는 학교, 우아한 여성들이 일본 거류지의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지난번 전쟁(청일 전쟁)에서 피해를 보지도 않았으며, 차분하고 평화롭게 발전하고 있으며 조선사람이나 외국인과의 마찰도 없다. 원산과 한양 사이에는 통신이 가능하며 주로 일본 유선회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저자에게 원산은 꽤 매혹적이었던 것 같다. 비숍 여사는 바닷가 흰 모래 밭을 보면서 장차 좋은 휴양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마. 떠돌며 본 인상


한강변 어느 비가비라는 마을에는 ''양반의 노비가 비가비를 지날 때, 그가 만일 공손하고 태도가 좋으면 무사할 것 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곤장을 맞게 될 것이다.'' 라는 문구가 큰 글씨로 새겨진 푯말이 하나 있었다.


참 희한한 주장을 하는 문구였다. 조선의 악담 중에는 양반이라는 특권 계급에 대한 것이 많이 있다. 양반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생계를 위해 직접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내의 삯 바느질이나, 빨래 삯으로 먹고 사는 한이 있어도 담배대조차 자신이 들고 다녀서는 안 된다. 양반이 여행을 할 때면 관습에 따라 종자를 대동한다. 이런 양반의 종자(노비)조차 마을 사람을 못살게 굴며, 닭이나 계란들을 대가 없이 가져간다.


바가비 마을의 푯말이 이런 풍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한 번은 내가 한강 가에서 사공에게 삯을 지불하고 있는데, 양반의 머슴이 돈 한푼 내지 않고 기와를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배를 징발하고 있었다. 나의 조선어 통역이 이 배는 외국인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징발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해주고, 머슴을 무마 시키기 위해 돈 몇 푼을 주었다.


 상인이나 농부가 돈이 생겼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양반은 빌려달라고 하고, 떼일 것을 걱정하고 거절하면, 양반집에 감금되어 곤장을 맞는다. 그래도 마을 입구에는 관리의 송덕비가 많이 있는데,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것은 아닌듯하다.


 조선에는 보통 여인숙과 여관이 있다. 여인숙은 앞 마당에 여물통이 있어 당나귀나 말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점을 빼고는 길가에 흔히 보는 오두막이나 다를 바 없다.


읍이나 큰 마을에는 여관이 있는데, 대개 지저분한 뜰에, 돼지, 닭, 개, 황소, 조랑말, 식객, 나그네 짐 등으로 복잡하고, 한쪽 켠에는 마구간, 여물통이 있다. 그 옆에는 밀을 담은 가마솥에 여물을 쑤고 있는데, 이 불기로 밥도 짓고 방을 덥히고 있어, 방이 꽤나 뜨겁다.


방은 진흙 바닥에 갈대 멍석이 깔려있고, 그 위에 베개로 쓰이는 나무 토막들이 놓여있다. 이 방에는 마부, 나그네, 하인, 식객 등이 와글거리고 있다.


조선 관리나 양반은 부근 마을의 관리나 양반의 환대를 받아 여관에 올 일이 없고, 농부들은 조금만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도 자기집을 개방하기 때문에 일본같이 여관 업이 전문직업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식사는 밥, 계란, 국, 국수, 해초, 밀가루 반죽 류 조선 진미가 제공되었다. 차는 제공되지 않았다. 봄철이면 개고기도 흔히 제공되었다.


하루 밤에 세끼를 먹고 200- 300량을 지불했다. 하루 낮 동안을 쉬고, 100량을 지불하니 여관 주인이 만족해 했다. 시골길 여인숙에서는 밤에 호랑이가 두려우니 방 문을 열지 말 것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여행하며 다니는 시골 길은 대개 사람들이 여러 번 다녀 자연적으로 생긴 오솔길뿐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길은 거의 없다. 많은 개천에는 다리가 없고, 있다 해도 대부분은 나뭇가지에 뗏장을 덮은 것에 불과하여 7월 장마에 쓸려 내려가 보통 10월까지는 복구되지 않는다.


한양으로 향하는 중요 대로 조차도 다리가 허술하여, 마부는 말보다 앞서 시험 삼아 건넘으로 다리가 말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한다. 


여행 중 어느 잔치 자리에서 기생이 부르는 시조를 들었는데, 서울에 살고 있는 헐버트 목사가 적어 주었다.

 

 

 오래 전 그대와 나
 손 잡고 맹서 했노라
 입술이 마르고 마음이 슬플 때면
 아무리 향기로운 술 일지라도
 슬픔과 목마름을 풀지 못 했나니
 모두가 흘러간 옛일 이로다

 이제 인생의 황혼 길에 접어들어
 삶의 쇠퇴는 시작 되나니
 어두운 여생인들 얼마나 남았으랴
 오로지 죽지 않는 술 잔을 벗삼아
 영원히 더럽혀진 사원을 슬퍼할지니
 젊은 날의 맹서가 사라진 그곳이여…

 아니다, 아니노라
 사념이여 물러가라
 즐거운 주연은 다시 내 영혼을 일깨우리니
 선인이여 잡으시라 이 한잔 술을
 독주를 파는 곳이 어드메더뇨
 저 건너 도원이 게 아니더냐
 행운이 그대에게 있을지니
 나 그대 위해 거문고를 타노라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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