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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고(3)-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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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다. 한양의 첫 인상


제물포로부터 한양의 강나루인 마포까지는 56마일로 배편을 이용하여 올라갈 수 있으나, 저자는 한양주제 영국 총 영사 대리인 가드너 씨의 주선으로 6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갔다.


당시, 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길은 잘 보이지도 않고, 초목이 우거진 곳도 있고, 때로는 깊은 구덩이가 있어 돌아가야 하는 등 황폐해 있었다.


낮은 산 근처에는 과수로 둘러싸인 마을, 언덕에는 소나무로 둘러싸인 무덤이 많았다. 사람 모습의 장승도 많았으나 시골의 일반 형태는 헐벗고 단조로웠다. 마포에 이르자 상품을 실은 황소, 갓을 쓰고 흰옷을 입은 통행인이 꽤 많았다.


거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우리는 도시의 거름을 잔뜩 싣고 시골까지 나르는 나룻배와 우연히 마주쳤고, 한강 모레사장에는 한양의 봄 청소를 하느라, 마포로부터 한양까지의 도로에 무수한 황소가 도시의 하수도 쓰레기를 적재한 광주리를 운반하는 것을 보았다.


당시 한양 판윤(지금의 서울시장. 정2품)은 환경과 위생의 개선을 위해 괄목할 만한 과업을 수행했다. 25만의 인구를 가진 한양으로 산더미 같은 나뭇가지(땔감)를 나르는 황소가 거의 하루 종일 길을 메우고 있었다.


그 혼잡한 군중 속에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남성들이 많이 보였다. 한양 내부로 들어가니 내가 북경을 보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가장 불결한 도시인양 생각됐던, 지독한 냄새로 도무지 한 나라의 수도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2층 집을 짓는 것이 관례상 금지되어 있어, 25만의 주민은 주로 바닥에서 생활하고 있다. 꾸불꾸불한 도로는 대부분 짐을 실은 황소 두 마리가 지나 가기도 힘들고, 각 가정에서 버린 오물로 가득한 하수도로 길은 그나마도 좁아졌다.


이미 다른 곳에서 본 바와 같이 수도 한양에서도 악취 나는 하수도가 벌거벗은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었다. 작은 좌판상점이 모두 합해 6달러 정도의 상품을 놓고 장사하고 있었다. 진열품이 매우 적어 모든 상품이 손에 닿을 만한 곳에 있다.


짧고 긴 담뱃대, 사발 그릇, 유약을 바른 그릇, 밥그릇, 일제 딱성냥, 물감, 담배 쌈지, 돈주머니, 두루마리 기름 종이, 장식 술, 비단 끈, 잣, 쌀, 기장, 수수, 완두콩, 짚신, 모자, 삿갓, 면포를 팔고 있다.


북경로를 따라 서대문을 지나 남산에 이르니, 비탈길 위에 단순하고 검소한 흰 목조 건물인 일본공사관이 보이고, 그 아래로 찻집, 극장과 일본인 복지에 필요한 시설을 갖춘 일인 거류지에 약 5000명이 살고 있다.


조선의 모든 거리와 비교해 청결하고 고상하고 검소한 여인들과 깃이 달린 옷을 입고 게다를 신은 남자들이 돌아다니는 상점과 집의 거리가 보였다. 조선은 오래 전부터 일인에 대한 증오심이 강했기 때문에 군인, 헌병, 착검한 장교들이 보였다.


중국인 거류지도 다른 거류지와 다르지 않았다. 외국인들은 중국 상점에서 많은 것을 구입하며, 조선 사람들도 이곳에서 약간의 거래를 한다. 


한양의 광경 중 하나는 개천이다. 넓고 양쪽으로 담장이 쳐있으며 복개되지 않은 이 개천을 따라 검게 썩은 물이 악취를 풍기며 흐르고 있다.


한 때는 자갈이 깔려있던 개천에는 퇴비와 쓰레기가 떠올라 개천을 온통 덥고 있다. 이 악취 나는 물가에서 통에 물을 길어와 옷을 빨래하는 여인들이 있다. 여인들은 불결한 한강이나 성 밖에 있는 시냇물에서 세탁을 한다.


한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그 산들은 거의 벌거숭이였다.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넓은 거리가 있고, 이 길에서 옆으로 벗어나 남대문에 이른다.


큰 중앙로에서 왕궁까지 60야드 넓이의 도로가 있는데, 이 도로가 장애물이 없는 유일한 길로 양편이 노점 거리로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이른 3월에 이곳을 보았는데, 한 거리는 지난해 내린 눈으로 여전히 길이 막혀 있었다.


이 셋의 거리에는 눈처럼 하얀 도포의 행렬이 있었다. 셋의 넓은 거리를 오가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사람들은 대개가 목적 없이 다니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부분 젊은 양반인데, 양반어른의 걸음거리를 흉내 내면서 큰 거리를 돌아다니는 이들은, 관직을 열망하며 한양에서 무엇인가 잡아 보려고 한양으로 몰려든 사람들이다.
한양이 곧 조선이라 할 수 있는데, 모든 공직의 임용, 그리고 채용의 유일한 통로인 과거가 여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에는 여론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국민 감정의 분위기는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나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원치도 않았던 서구문명과의 접촉에서 오는 최초의 긴장을 느끼면서, 깊은 잠에서 깨어나 반쯤 부신 눈을 비비며, 자신을 돌보아야 하는 개화기 불안정한 분위기가 한양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조선에서 상업이라고는 행상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모든 사업 역시 한양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인지 모든 조선 사람들의 마음은 서울에 가있어 지방관리들은 한양에 별도의 집을 가지고 있고, 일년의 대부분은 한양에서 지낸다.


그 기간 동안 지방의 자기 업무는 부관에게 맡긴다. 지방지주도 임대료를 받으면서 농민을 쥐어 짜내며 부재지주로 서울한양에 거주한다.


좀 가진 게 있는 사람들이나, 어디 기댈 곳이 있는 사람들은 일년에 한 두 번씩 서울에 올라온다. 이제 변화의 시동이 꿈틀대는 격변의 시기에, 그래도 한양은 조선 사람들에게 살만한 곳이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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