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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심(公心), 사심(私心)
chonhs

 

 약 반세기 전, 내가 근무하고 있던 APD-81함(amphibious, patrol, destroyer)이 미국 독립 200주년 해상 관함식(parade)에 참가하게 되었다. 즐거운 일이다. 당시 70년대에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절인데, 미국에 가게 됐으니.


그런데 문제는, 배만 가는 게 아니라 의장대, 군악대, 참모 등 행사요원이 동승함으로 이들의 침실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즉, 얼마간 배 승조원이 미국 방문을 포기하고, 자기가 자던 침대를 비워주어야 했다.


 이 배는 일반 구축함을 해상 대간첩 상황에 대응코자 약간 개조해서, 해병 1개 소대를 싣고 다니게 되어있다. 함미의 포를 제거하고, 해병 50명이 탑승할 공간과 고속 주정 2대가 실려있었다.


예를 들어, 도망가던 간첩선이 섬으로 상륙해 숨어버리면(60, 70년대에는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해병이 상륙해 추적하는 것이다.


고속 간첩선은 전투함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공군이 출격하니, 바다 위에서 도주해봤자 공군의 쉬운 표적이 됐다. 파란 바닷물 위에 길게 흰 물줄기를 뒤로 뽑으며 도망가는 간첩선은 하늘에서 볼 때, 간첩선 식별을 오히려 도와주어 쉬운 표적이 됐다. 그래서 섬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한 달여의 대양횡단과 행사준비에 모두들 부산했다. 태평양 가운데에서 기관이 고장 나면 안 되는 일이니, 엔진 정비에서부터, 승조원의 흰 복장 준비까지.


이런 일이야 각 부서장 책임하에 진행됐으나, 주로 수병의 양보를 받아야 하는 하선 인원 선정은 부(함)장의 업무가 되었다.


기관부는 태평양 횡단 항해를 하니 인원을 줄일 수 없고, 작전부는 해상 경계가 아니니 좀 줄이고, 포술부가 주 타깃이 됐다. 기념행사니 포를 쏠 일이 없어 거의 모든 수병이 하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참가자와 하선자의 선정에 적용할 무슨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의의 협조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막무가내 버티면 할 수가 없는데, 그런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에겐 6주간의 장기 휴가보다 미국 구경이 당연히 더 좋았기 때문이다. 탓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부장이 해결해야 하는 업무가 됐다. ''나도 내린다''고 배수진을 치고, 맨투맨 양보를 구했다.


승조원들은 ‘부장이 내린다니, 그저 하는 소리려니’ 했으나, 협조해 주었다. 하선 인원 선정도 끝나고, 행사요원 침실 배치까지 대강 끝나자, 나는 약속대로 배에서 내렸다.
이렇게 해서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해상 퍼레이드 참가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이 글은 필자의 군생활 경험담이다. 내 자랑 하고자 쓴 글이 아니다. 모두들 거부하고 나서려 하지 않을 때, 이를 앞장서는 것은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꽉 막힌 일을 쉽게 풀게 한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런 게 ‘희생’ 아닐까(?). 필자는 이를 공심이라 생각한다. 배에서 부(함)장은 세컨드 맨이다. 난들 가기 싫었겠나(?), ''내가 왜 내려'' 한들 누가 뭐라겠나(?)
부장이 먼저 미국 방문을 포기하자, 수병들도 따라주었다. 공심과 사심, 때로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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