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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100년과 민비 시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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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세계의 황제가 되고자 했던 나폴레옹은 유럽의 정복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영국을 고사 시키고자, 대륙봉쇄령을 명한다. 그러나 경제적 유대가 깊었던 러시아가 이를 어기고 영과 무역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러 원정에 나선다.


그의 60만 대군이 모스크바의 동장군에 대패하고(1812), 그 후, 영, 프로이센 연합군에 완패한 후(1815. 워터루), 나폴레옹이 사라진 세계는 바야흐로 영, 러의 무대가 된다.


러시아가 은둔의 나라 조선의 민비 시해에 연루된 사연은 오로지 한반도가 갖는 지정학적 의미 때문이다. 즉, 러의 대륙진출 꿈은 독일에 막히고, 해양진출의 꿈은 영국에 막힌 상황인데, 특히나 대륙국가인 러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가 필요했다.


1860년, 아편전쟁의 중재 대가로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당 받은 러시아가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러는 조선 역사에 발을 내디딘다. 러의 남진을 저지하고 있던 영은 청이 이를 막아주기를 바랐으나, 청일전쟁을 보고 청에 실망해 그 역할을 일이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 아시아에서 일은 제1의 육, 해군을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청의 심한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차에, 청일전쟁으로 일이 점령한 산동반도(려순항) 반환을 이끌어낸 러의 힘을 보고 보호를 부탁하려 한다.


고종은 러 황제,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그의 측근 민영환을 보내 이를 타진한다. 러는 이왕에 부동항 획득의 꿈이 있어, 조의 지정학적 가치에 유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러시아의 중심부에서 너무 먼 거리에 있는 관계로 군사력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관여는 불가하여, 외교상 크게 실망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외형상 우의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나 조선 주재 러공사 내외는 고종, 민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민비로 하여금 이를 오해케 했다. 이로서 민비는 러를 믿어도 좋다고 생각 했는지(?), 당시의 친일 내각을 친러, 친미 내각으로 교체한다.


일로서는 무심할 수 없는 사태다. 일찍이 조선을 거쳐 만주로 진출하고자 하던 차에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면 큰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은 민비를 친러정책의 핵심인물로 보고, 조-러의 연결고리인 민비를 제거코자 한다. 이것이 민비 시해이다. 

 

 본론


1800년, 조의 23대왕 순조가 10세에 왕위에 오른다. 이어서 헌종이 8세, 철종이 19세, 고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른다. 이렇게 100년 동안 어린 소년을 왕이라 앉혀놓고, 그의 외척들이 준비도 개념도 없이 국정을 담당한다.


조선 후기 100년(1800-1907), 통한의 역사는 이렇게 정도를 외면하고 농간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가려던 위정자에 의해 결국 망한다. 1849년, 강화도에서 농부생활을 하던 젊은이가 졸지에 가마 타고 한양에 입성해 왕좌에 오르니, 그가 철종이다. 


당시 청은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근대화 서구의 의미를 경험하고 있었고, 일은 명치유신의 시기로 근대화에 맹진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은 12살 어린 왕을 대신해 그의 아버지 대원군이 집정한다.


대원군도 각종 국정의 병폐를 모르는 바 아니어서, 그로서는 개혁에 노력하고 있었으나, 이미 지난 시대의 인물이었다. 격변의 19세기 시대정신에 부응할 수가 없었다.
천운도 따르지 않는지, 1882년부터 3년 터울로 연속 흉년이 들더니만, 92년부터는 연이어 가뭄이 찾아왔다. 이로 인한 굶주림은 돌림병(콜레라)을 불러와, 1876년 대흉년 후, 1878년 경상도 어느 곳에서는 인구3만 명이 4천명으로 줄었다.


 이러한 피폐한 민생의 어려움을 돌보아야 할 위정자들의 본분은 무엇이었는지, 이들의 사리사욕, 가렴주구는 민생을 고달프게 해 민심을 이반케 했다. 이로서 국정의 근간은 무너지고, 조선은 군인 봉급도 주지 못하는 실정에 이르러 군의 반란이 터졌다(임오군란). 


대원군 10년, 19세기 시대상황을 모르는 채 나름의 개혁을 주도해 나가던 대원군이 하야하고, 20대 고종이 친정을 시작할 때(1873) 자의반 타의반 일과 개국에 합의한다(강화도 조약).


이로서 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식 별기군이 창설됐으나(1881), 오히려 이로 인해 군란이 발생하고, 이의 진압에 청이 지원한 후, 조는 청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과 한국 사이에 속국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그 즈음이다. 당시 주일 청 공사가 일의 대만정복(1875), 오키나와 합병(1879)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어, 청의 실세 이홍장에게 조의 식민지화를 건의한다. 이에 굳이 그럴 것 없이, 실질적으로 속국화하면 된다, 하며 그의 부하 원세개를 파견한다.


이로서 청은 외교, 내정, 인사 등 모든 국정을 간섭하는 상황에 이른다. 고종도 이를 반기지는 않았으나 청에 의탁, 정권을 유지할 뜻이 있어 이를 견뎌내고 있던 참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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