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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나(8)-서로 다른 길을 간 중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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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중국의 남서 해안도시 광주에 아편 근절을 위해 파견된 관리인 임칙서는 압수한 아편 2만 상자를 불태워 버린다. 이에 영국의 파아머스턴 내각은 중과 개전을 결정하고, 4000명을 태운 군함 20척의 원정군(1만 명의 증원군이 합류한다)을 보내 청의 항복을 받아낸다.


한-중-일 역사는 이 아편전쟁을 근대사의 기점으로 본다. 그리고 반세기 후 일은 근대화에 성공했고, 청은 실패했다고 알려진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을까?


 본론


1867년 가을, 일본 사쓰마 번(현재의 가고시마 현)의 막료였던 오쿠보 도시미치가 오늘의 도교에 해당하는 수도 에도를 떠나 야마구치 현으로 향했다. 조수 번주(영주)를 만나 힘을 합쳐 군사를 일으켜 에도로 쳐들어가 쇼군(영주의 우두머리)을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이미 몇 개의 번주가 진영에 참여해 있었다.


1868년 일은 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였다. 1600년 이래 일을 장악한 것은 도쿠가와 가문으로, 그 시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천왕으로부터 쇼군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천왕은 이름 뿐인 왕으로 뒷전에 밀려나고 실권은 쇼군에 있었다. 쇼국 예하의 각 번은 자신의 영역에서 세금도 거두고, 봉건영주로서 통치했다. 직업의 귀천도 엄격했고, 사, 농, 공, 상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은 무거운 세금에 거주지 이전도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쇼군은 수도 에도에서 권력을 틀어쥐고, 외국인은 발도 못 붙이게 했다. 정치, 경제 제도가 모두 착취적이어서, 당시 동서의 대부분 나라와 같이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쇼군이 명목상 전국의 통치자로 임명되었으나, 실제로는 전국을 장악하지 못해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번에는 힘이 미치지 못했고, 따라서 중앙은 쇄국정책을 펴고 있으나 남부에 위치한 사쓰마 번의 경우 외국과 통상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근대 국가를 수립하고 싶다는 개혁의지는 지방에서부터 싹텄다. 이들은 외세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천왕과 쇼군으로 나누어져 있는 국가 권력을 왕 중심으로 일원화 해야 한다고 보았다.


도사 번에서는 잘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 같은 걸출한 인물도 합세했다. 1868년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무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통치권을 왕에 반납하기로 하고 메이지유신을 선포한다. 


이후 봉건제도가 철폐되고, 모든 영지(300여 개)가 정부로 환수됐다. 각 번은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가 다스렸다. 정부는 근대식 관료정부로 대체됐고, 세금도 중앙정부가 관리했다.


법 앞에 모든 계층이 평등하다는 이념도 도입되고, 국내 이주와 직업선택에 대한 규제도 철폐되었다. 1890년 아시아 최초로 헌법을 채택해 의원을 선출하고, 독립적인 사법부도 설립해 입헌군주제를 시행했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가 일을 근대적으로 바꿔, 서구 산업혁명의 혜택을 쉽게 받아들이는 요인이 되었다.


19세기 중반에만 해도 중과 일은 똑같이 절대주의 정권아래 허덕이는 가난한 나라였고, 두 나라 모두 변화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두 국가간에는 주목할 만한 정치적, 사회적 차이가 있었다.


중국은 절대권력을 틀어쥔 황제가 다스리는 강력한 관료제국이었고, 그만큼 변화가 힘들었다. 더욱이 국내 혼란(태평천국의 난)으로 남부 전체가 만신창이가 되었다.


 반면, 일본의 정치제도는 달랐다. 도구가와 막부가 천왕을 밀어 냈지만 그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못했고,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여러 번들은 독립을 유지하고 해외 무역도 할 수 있었다.


아편전쟁 후 미국 페리 함대가 도교만에 등장하자(4척) 위협을 느꼈다. 중이 무너지고 다음이 일이라는 소문에 긴장했고, 군사적 낙후를 절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며, 이는 제도적 개혁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인식에 따라 구 기득권 세력인 쇼군을 무너트리고, 구 지배체제 막부를 종식시키게 된다. 


메이지유신이 선포되자 정치, 경제뿐 아니라 모든 사회제도를 바꾸면서 탈 아시아를 기치로 매진한다. 


중국도 상황은 비슷했지만 애초에 정치제도가 달랐고, 체제를 바꾸기가 한층 어려웠다. 아편전쟁이 있고 반세기 이상이 흐른 1911년, 손문의 신해혁명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당시 중은 국가 개조에 대서는 생각도 없고, 근대무기를 도입해 서구에 맞서면 된다고 보았다. 인식의 차이로서 두 국가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결론


개혁의 길을 택한 일은 그 후 고속성장의 길로 들어섰지만, 중은 구 제도가 그대로 존속한 가운데 모택동 시대를 맞게 된다. 다음 호에 두 나라와 그리고 조선이 걸은 길에 대해 좀더 깊이 들여다 본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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