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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나(4)-노예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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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옛 시절, 노예는 어느 문화권에나 있었던 일이다. 징기스칸도 많은 포로를 잡아가 노예로 쓰곤 했다. 포로를 각 가정마다 몇 명씩 선물, 그들의 가축 등을 돌보게 했다.


 근대에 이르러 산업혁명과 면직생산이 늘면서 목화농장이나 사탕수수밭 등의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1807년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금지 시키고, 미국에서는 남북전쟁도 했지만(1861-1865), 노예제도가 사라진 것은 기계가 농사에 투입되면서 부터였다.


 본론


 근대초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동남아시아에서 향료무역으로 재미를 보고 있던 시기, 아프리카에서는 사뭇 다른 형태의 무역이 성행하고 있었다. 바로 노예무역이다. 


 사실 노예제도는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었다. 고대 로마는 로마시 인구200만에 노예가 500만이나 됐다.

부모가 로마 시민의 가정에서 불 때는 일을 했으면 그의 자손도 부엌에서 태어나 불때는 일을 하며 생을 살아가야 했다.


 로마시절에는 흑해주변의 슬라브족, 서아시아, 북유럽에서 노예를 공급 받았다. 하지만 1400년 무렵부터, 유럽인은 더 이상 서로를 노예로 쓰지 않았다. 


 17세기 초엔 카리브해 지역의 식민지에서 사탕수수 대농장이 발달하면서 아프리카(콩고, 앙골라 등)에서 노예를 데려왔다. 특히 포르투갈인에 의해 공급되었다.


 18세기로 접어들면 대서양을 건너는 노예 수가 600만을 넘었고, 많은 수가 아메리카 목화밭으로 향했다.


 이들은 대부분 내전에서 포로로 잡혀 팔려간 사람이다. 이 돈 되는 장사 때문에 부족간 전쟁은 끝이지 않았다.
 번 돈은 무기 수입에 사용, 당시(1750-1800년대 초) 영국에서 아프리카로 수출하는 총만 해도 년 30만정이 넘었다.


 영국에서 노예무역을 폐지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됐고, 1807년 노예무역을 불법으로 규정한 법이 통과됐다. 영국은 노예무역을 뿌리 뽑고자 대서양에 함대를 배치하는 등 적극적이었으나 이런 조치가 실효를 거두는 데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무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권이 수두룩한데, 영국이 노예무역을 금지시켰으니 팔지 못하는 노예를 어찌할 것인가. 다행히(?) 유럽, 북아메리카의 산업혁명 확산으로 고무, 상아, 땅콩, 팜유 등 새로운 물품 수요가 증가되자, 팔지 못하는 노예를 이런 새로운 품목을 생산하는데 투입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가나에서는 1807년까지만 해도 노예사냥과 수출이 주 수입원이었다. 붙잡은 노예를 해안으로 끌고 가, 거대한 노예시장에 팔아 넘겼는데, 이들은 대농장 일꾼으로 넘겨졌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바퀴달린 운송수단이 없어 모든 화물은 노예의 피땀으로 운송했다. 따라서 노예무역 폐지는 노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노예가 팔려가는 지역만 바뀐 것이었다.


 그 결과 19세기 아프리카 노예제도는 위축은커녕 오히려 확대됐다. 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노예제도는 한참 지난 20세기 초까지 살아남았다. 시에라리온에서는 1928년 돼서야 폐지됐다. 그곳 수도는 미 대륙에서 돌아온 노예들의 안식처로 이름이 자유시(free town) 였다. 노예제도 퇴치 임무를 띤 영국함대의 본거지 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시에라리온 노예제도는 영국에서 노예무역이 폐지된 후 100년 이상이나 더 존속 되었다.


 리베리아 역시 1840년대 노예해방을 위해 붙여졌다. 리베리아(liberia)는 자유(liberty)를, 수도 이름 몬로비아(monrovia)는 노예해방을 주도한 미국 대통령 몬로(James monroe)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이곳에서도 노예제도는 20세기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결론


 자기 국민을 노예로 잡아 팔고 있는 국가에서 실패니, 성공이니 언급할 처지도 못된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대부분 국가는 세계 최빈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필자가 군 생활 중 사무실에 필자와 같은 해 미 육사를 졸업한 친구와 책상을 맞대고 있던 적이 있다.


 이 친구는 대학원에서 한국을 전공하고, 어느 사단의 civil affairs officer로 근무한 바 있어, 이런 저런 음지의 이야기도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화가 나면 “--나라는 100년 전만 해도 반이 slave 였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그 시절엔 노예제도가 별난 제도도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다면 문제지만. 우리 이웃, 북한은 아직 그런 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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