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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나(2)-민비 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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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19세기,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무찌른 영국(1801), 그리고 시베리아 벌판에서 나폴레옹 대군을 무찌른 러시아(1812)가 이후 세계의 강자로 떠오른다.


 대륙세력인 러는 서쪽으로 유럽을 향해 영토 확장을 도모 하였으나 독일에 막히자, 진로를 남으로 바꾸어 동아세아, 중국으로 향한다. 


 이에 당시 인도를 식민지화 하고 섬과 해외 기지를 연결, 해가 지지않는 제국을 형성한 후 중국까지 진출 중인 영국과 충돌하게 되고, 그 여파가 한반도 조선에 이른다.


 민비 시해는 이때 조선에 들이닥친 열강들의 각축 중에 일어난 비극이다. 영은 러의 남진도 막을 겸 청과 제2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영 군대가 북경에 이르자 다급해진 청은 러의 개입을 요청하는 상황이 되어 결국 영의 청 침공은 오히려 러의 남진을 도운 형국이 되었다. 러는 개입 대가로 연해주를 얻는다.


 덕분에 러는 염원하던 태평양에 이르는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를 획득해 개발하나, 연중 4개월은 얼음에 막히고, 2개월은 부빙에 안전 항해가 안됐다. 결국 러의 태평양 함대는 겨울에 일본(사세보), 중국(대련)에 피한을 하는 처지였다.


 때마침 연해주 획득으로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된 러가 부동항을 염두에 두고 조선의 역사 속에 발을 내딛는다. 당시, 러는 언젠가 조선이 자기의 땅이 되리라 생각했다.


 러의 의중에는 그들의 부동항으로 중국의 대련과 여순항, 조선의 영흥만과 부산을 염두에 둔다.


 영-러의 대결 속에 영은 러의 남진을 청이 막아주기 기대했으나, 청일전쟁 결과에 실망하고 뒤늦게 아세아에서 유일하게 강자로 떠오르는 일과 손을 잡는다. 영-일동맹을 통해 일 해군이 러 저지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본론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잘 아는 것 같이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1884)은 청의 세력을 몰아내고자 일본이 김옥균 등 개혁세력을 부추겨 일으킨 사건이었으나, 청의 반격으로 3일 만에 끝남으로 오히려 청의 조선 지배를 강화시킨다.


 이에 조선은 영-미의 협조를 바랐으나, 이들은 조선과 수교 했다지만 실질적인 이득을 취할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조선의 기대에 냉담했고, 이에 실망한 조선은 자연히 접근하고 있는 러를 바라보게 된다.


 러는 연해주 획득을 계기로 국경을 맞대게 된 조선에서 부동항을 찾던 중이라 조-러는 서로 주고받을 이해관계가 형성됐다.


 그러나 러가 조선에 진출해 부동항을 갖게 되면 영은 해상지배권에 위협이 되었다. 이에 영이 한 수를 사용한 것이 거문도 점령이다(1885). 


 거문도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러 태평양 함대를 봉쇄할 수 있는 위치로는 좋았으나 섬 자체가 항구로 개발하기에는 부적합하여 2년 후 영은 스스로 철수한다.


 민비의 러 접근은 조선의 정황을 바꾸어 놓았으나, 조선은 러의 중심부에서 너무 멀리 위치해있어 병력 수송에 1년이 넘게 걸리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착공 1891, 부분 준공 1897)가 완공되기까지는 현실적으로 병력 지원이 불가해 명목상 도움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일전쟁이 발발(1895), 일이 파죽지세로 전략 요충지인 대련을 단독 점령하자, 러가 반발해 불-독과 연합으로 일에 반환을 요구한다(3국 간섭).


 일은 이들 3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여력은 없어, 국민의 지탄을 감수하며 피흘려 얻은 대련을 반환한다.
 이를 지켜본 민비는 한반도 주변의 힘의 균형이 러에 있다고 판단, 일의 조선 지배 역시 약화될 것으로 예단했다. 이에 친일 내각을 해산하고 친러, 친미 내각으로 교체한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일은 조선을 거쳐 만주, 중앙아세아로 침탈하려는 야욕을 갖고 있었고, 그 과정에 남진을 기도하는 러와 불가분 충돌이 있을 것으로 생각, 이미 러를 일의 주적으로 상정해 놓은 터였다.
 이를 알 길이 없었던 민비는 단지 보이는 것만을 믿고, 러를 불러 일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은 승전국으로 조선 지배를 더욱 강화, 대륙 침략의 후방기지로서 식민지화의 기초를 한층 더 확고히 하는 참이었다. 이런 차에 러가 조선에서 입지를 굳힌다면 야심은 초반부터 좌절되는 것이고, 더욱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공되어 러의 1백만 대군이 밀려온다면 지난 16세기 이순신에게 좌절된 야욕이 19세기엔 러에 좌절될 순간이었다.

이에, 일은 특단의 조치를 세워 조선과 러의 연결을 단절시켜야 했다.


 결론


 3국 간섭 직후, 일은 기증금(300만 엔)을 미끼로 왕비를 회유하려 한다. 그러나 3국연합이 와해되고(독 이탈), 그 결과 3국 압력이 이완되자 무단적 방법으로 선회한다.


 그간 조선 공사로 있던 이노우에를 군 출신 미우라로 교체한 후 37일만에 왕비는 살해된다. 이노우에는 일왕의 7인 자문위원에 속해있었기에, 일 정부는 그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거사 직전 교체한 듯하다.
 일 정부는 시해 후 미우라 외 40여명을 소환, 재판에 회부 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석방한다.


 역사에서 흔히 비극은 비극을 부르는데,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1892), 러일전쟁(1905), 한일합방(1910)이 이어진다.

민비시해는 강자 사이에서 약자였던 조선의 가슴아픈 기억이다. 왕비가 자기 땅, 자기 나라에서 자객의 칼을 맞다니.

국가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자의 길을 걷거나, 불가하다면 최소한 현명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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